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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청년 이봉창이 변화하였던 이유: 민족차별
저자/역자
배경식
출판사명
휴머니스트
출판년도
2015-11-30
독서시작일
2022년 12월 21일
독서종료일
2022년 12월 22일

서평내용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봉창을 일제 식민지 시대에 대항해 일본 천황 폭탄 의거를 시행한 대단한 독립운동가로 알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이봉창의 독립투사에 대한 모습 때문에 그가 원래부터 조선 독립에 대한 염원과 생각을 꾸준히 하고 그에 맞게 청렴하게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것이다. 나 또한 사실 독립운동가들은 할아버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독립운동을 하거나 혹은 진짜 처음부터 독립운동가로 태어났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왜 나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였는지 의문이 생겼다. 물론 대를 이어서 독립운동가가 된 분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어떻게 처음부터 독립운동가로 태어났을까? 그것은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분명 어떠한 계기 혹은 이유가 있었기에 다들 독립 운동가로서 조선 독립을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이봉창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이봉창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봉창은 1901년 서울 용산구에서 건축 청부업과 우차 운반업으로 부를 얻은 이진구의 둘째 아들, 즉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11년 사립 문창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봉창이 문창학교에 입학한 그 해에 일본은 ‘조선 교육령’을 통해 조선말과 조선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일본 역사와 일본어를 국사, 국어로 가르쳤다. 이봉창이 1901년 일제 식민지 시기 이전에 태어났다 하여도 기본적으로 교육을 시작한 1911년은 이미 식민지 시기였다. 따라서 그는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본에 동화된 ‘신일본인’으로 성장하였다. 즉, 그는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독립운동가로 태어나지는 않았고, 오히려 ‘신일본인’으로,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가 기존에 살던 용산, 원정은 일본의 군사시설과 교통·통신 기관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자 일본인들의 밀집 주거지가 생성되어 있는 곳으로, 이봉창은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익혔고 잘 할 수 있었다. 그가 문창학교에 들어갈 무렵, 아버지의 악성 매독으로 인해 사업에 신경을 쓰지 못하면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고,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바로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에서 겪은 민족 차별로 인해 체념을 느끼며 향락을 즐기다가 상하이로 가서 진정한 조선인으로 살고자함과 독립운동을 결심하여 임시정부에서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의 단원이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봉창은 자신이 ‘신일본인’이라는 생각으로 자라왔다. 사실 이봉창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자랐고, 심지어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더욱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한글보다 일본어를, 한글 이름보다 일본 창씨가 자신의 이름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는 여전히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이었기에 차별과 탄압을 받았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를 위한 통치 선전으로 ‘동화주의’를 내걸었다. 그러나 식민지 국가와 지배 국가가 ‘같아진다’, ‘동화된다’는 것은 애당초 이루어질 수 없는 선전이었다.

이봉창은 첫 번째로 일을 하면서 ‘민족차별’을 경험하였다. 그는 조선에서 약국, 과자 가게에서 일한 이후 용산역 조차계의 시용부로 취직하였다. 처음 1년동안 이봉창은 열심히 일하여 빠른 승진을 하였다. 이봉창이 연결수가 되었을 당시 용산역 조차에는 일본인보다 조선인이 더 많으며 조선인들이 더 일을 잘하였지만 이후 새로운 주임이 오면서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 연결수는 많이 위험한 작업이어서 사고로 많은 일본인 희생자들이 생겼지만 주임은 그 자리에도 일본인을 채웠다. 즉, 차별대우였다. 또한 임금과 상여금, 승진 속도 등 여러 방면에서 일본인들과 조선인은 차별받았다. 조선에 온 대부분의 일본인은 조선인들을 멸시하였다. 자신들은 내지에서 온 우월한 사람들이고 조선 사람들은 자신들이 근대화 시켜야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미개한 사람들로 보았을 것같다. 책에서도 이야기하지만 제도적 차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인간적인 멸시이다. 보여지는 제도적 차별은 글을 통해 보여지고 차별에 대한 법적 그 근거라도 있기 때문에 없애고자 하는 시도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은 같은 인간 사이의 감정적인 멸시는 멸시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우울하고 더욱 위축되게 하여 문제이다.

이렇게 이봉창이 처음 겪은 민족차별은 그를 ‘나는 조선인으로 태어났으니까 어쩔 수 없다.’라는 생각과 함께 일본인들을 이해하고 자신도 일본인에게 인정받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점차 대우가 더욱 나빠지고 차별대우에 대한 불만으로 술을 자주 마시고 여자와 가까이하고 도박·외상을 하기 시작하였다. 위와 같은 두 가지의 이유로 이봉창은 철도 회사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가고자 하였다. 그를 포함한 많은 조선 청년들이 일본 내지에 가면 조선보다 덜 차별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과연 그러했을까?

나는 이봉창이 일본으로 가기 전 행적들이 굉장히 반전이었다. 그는 금정의 관왕묘 보존 운동에 참여하고, 금정청년회 자치부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그 영향으로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간이 국세 조사의 조사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즉, 일본의 식민 정치에 조금이라도 협조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이봉창이 민족차별을 경험했기에 더더욱 일제를 반대하고 반항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의 이봉창은 나의 예상과는 반대로 자신이 조선인으로 차별을 받는다는 것을 알기에 최대한 일본인으로, 일본인처럼 살고자 하였다.

이봉창이 느낀 민족차별 2. ‘보호해줄 나라가 없다

당시 일본으로 가기 위한 합법적인 방법은 쉽지 않아 밀항이 많이 이루어졌다. 조선 청년들에게 조선은 그저 망한 나라이고, 망하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할 수 있는 미래를 생각하며 펼칠 수 있는 활동이 없어 일자리를 위해 많이 밀항하였다. 일본에서도 이봉창은 민족차별을 경험하였다. 직업소개소를 통해 간 가게들은 이봉창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고용하지 않았다. 혹은 일을 시켜도 일본인보다 훨씬 싼 임금으로 현대의 3D 직종과 같은 힘든 노동을 시켰다. 이봉창은 1926년 2월부터 오사카 가스 회사 인부로 일하며 ‘기노시타 쇼조’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책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술과 도박으로 수입을 낭비한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집에 돈을 송금하고 열심히 일하였다. 일본인들은 왜 이러한 생각을 하였을까?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위와 같은 조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선전하며 이것이 세뇌되었을 것 같다. 솔직히 조금 속상하였다. 근대사를 볼 때 감정적으로 다가가는 것을 조심스럽게 생각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속상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봉창은 이때까지 자신은 ‘신일본인’이기 때문에 일본 천황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928년 11월 10일 천왕 즉위 대례를 보러 가기로 하였다. 일본 천황은 다이카 개신을 통해 자신들을 권력을 얻어 가마쿠라 막부까지도 조금씩 권력을 행사 하였지만 그 이후의 무로마치 막부, 전국시대, 에도막부에서는 크게 천황의 권력 행사가 강하지 못하였다. 막부 시대에는 오히려 쇼군이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이 벌어지면서 천황을 더욱 신격화하고 숭배하게 하였다. 그렇기에 일본인으로서 천황을 보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자 굉장한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봉창은 천황을 보지 못하고 사상범 예비 검속에 걸려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

이봉창은 민족차별로 인해 유치장에 갇힌 것을 계기로 하여 기존의 일본인으로 어떻게든 살려고 하였던 생각을 접고, 조선의 독립에 대해 고민하였다. 힘없는 조국이기 때문에 자국민들이 아무 죄없이 유치장에 갇혀 있어도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고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나는 나라가 하여야 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봉창이 유치장이 갇힌 당시에는 ‘대한제국’,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미 망하고 없어진 나라였지만 동화주의를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차별하고 보호는 커녕 더 조선 민족 전체를 탄압하였던 일본에 대해 많은 조선인들은 분노하고 반항하고자 하였을 것 같다.

떳떳한 한국인으로 살고 싶다.

이봉창은 이후 대공황 속 일본의 불경기에서 일자리를 구하다가 떳떳한 한국인으로 살기 위해 상하이 임시정부로 갔다. 당시 임시정부는 경제적으로 후원금이 점차 줄어 힘든 상황과 함께 좌우의 대립으로 인해 정치적으로도 분열된 상태였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폭탄으로 천황을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봉창은 평범한 조선의 청년이었지만 위의 말을 통해 그가 정말 큰 생각과 대단한 결심,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천황에 대한 경계가 삼엄하지만 못할 것도 없다.”라는 말이 그저 허세라는 생각을 들지 않고 김구의 마음을 열 수 있도록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리고 상대는 당시 조선 전체를 식민 지배하였던 일본 제국주의의 수장인 천황이었기에 생각만 해도 떨릴 수 있지만 이봉창의 기세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김구와 이봉창의 천황 폭탄 투하 사건

김구는 미주 동포들의 후원을 통해 이봉창이 사건을 벌일 돈을 마련하였다. 이봉창은 일본으로 가기 전 사진관에서 선서문과 수류탄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이봉창이라는 인물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그 사진인 것 같다. 그리고 떠난 이후 다시는 보지 못할 청진에 있는 형에게 보낼 기념 사진도 찍었다. 이 때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자신이 조선 독립이라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 천황을 죽이는 큰 사건을 일으키겠다고 말하였지만 그의 마음도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뒤에 이봉창과 김구가 하는 이야기를 보면 두 명 모두 이 사건이 터짐으로 해서 바로 조선에 독립이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구의 말처럼 이봉창의 의거는 이 사건을 발판으로 하여 꾸준히 희생자를 보내 조선이 독립을 원하고 있음을 세계에 알리는 소리가 될 수 있을 만큼 큰 영향력을 차지하였다. 천황을 상대로 의거를 저지르는 사람은 이봉창이 처음이었다. 이후 윤봉길까지의 한인애국단 활동이 계기가 되어 조선의 독립운동가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장제스의 외면과 일본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국제사회 속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이봉창이 일본으로 떠날 때 많은 사람들이 마중을 나왔는데 그 중에 일본으로 가는 소개장을 써준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의 경찰 간부도 있었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읽고 정말 윤봉길이 상하이에서 일본인으로 잘 위장하여 살아왔고, 정말 일본인처럼 보였다는 것에 감탄이 들었다.

거사를 치룬 후 이봉창의 실제 모습은 우리가 알던 것과 다르다. 우리들은 이봉창이 수류탄이 터지는 모습을 보고 태극기를 꺼내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에게는 태극기가 없었다고 한다. 김구는 그에게 거사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줄 때 태극기는 주지 않았다. 우리가 기존에 알던 이봉창의 모습은 김구의《동경작안의 진상》에 기록된 이봉창을 더욱 영웅적으로 모사하여 만들어진 상상이다. 그리고 일본군들은 정신없었기에 수류탄을 던진 범인으로 이봉창을 바로 체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대신 체포하였으나 이봉창이 소리치며 자신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수류탄이 제대로 터지지 못한 것은 제조 과정에서 불발탄이었다고 한다.

신일본인에서 조선의 독립운동가가 된 이봉창

이봉창은 조선 왕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지만 일본 천황의 얼굴을 보러 동료들과 함께 가고 일본인들을 이해해보려고 하였다. 즉, 자신 스스로가 ‘신일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일본인으로 최대한 살아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직장과 유치장에서 겪은 민족차별의 영향으로 ‘조선의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그동안 독립운동가에 대해 알고 있었던 틀을 깰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는 정말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 전에는 그저 평범한 청년, 여자 등의 ‘아무나’에 불과하다. 이봉창은 향락을 즐기고 유곽을 열심히 다니기도 하는 그저 평범한 일제 식민지 강점기의 청년이었다. 그 외 많은 일제 식민지 시대 조선인들이 그러하였을 것이다.

평범한 청년 이봉창의 의거는 일본의 ‘동화주의’ 선전이 거짓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아직 있으며, 조선이 식민지로서 탄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세계에, 그리고 중국에 알리는 것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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