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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동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저자/역자
조은
출판사명
또하나의문화 2012
출판년도
2012
독서시작일
2020년 12월 18일
독서종료일
2020년 12월 18일

서평내용

 

연구자는 책의 시작에서 사당동과의 첫 만남을 회상한다. 생동감 넘치는 동네 분위기에 놀라고, 칼잠을 자야 하는 집안에 두 번 놀랐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연구자의 편견은 어느 정도로 배제되어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가난 이라고 하면 우울하고 무기력한 느낌이 든다. 이러한 이미지 때문에 연구자가 가난한 동네에서의 생동감을 어색하게 느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자가 첫 번째로 놀란 것은 편견을 배제하지 못한 결과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이러한 편견을 만드는 부정적 이미지가 실제의 가난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잠을 자려면 옆으로 몸을 세워야만 하는 좁은 집의 모습은 편견을 배제하되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 되겠구나하는 깨달음과 함께 연구자와 나를 놀라게 했다.

 

또한 연구자는 본인의 가족과 할머니 가족을 무의식적으로 구분해왔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금선 할머니와 연구자 어머니의 경우 비슷한 나잇대로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겪은 것까지 같았다. 연구자는 두 그룹을 같은 범주에 놓지 못한 것이 사회적 계급에서의 차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 또한 편견의 배제와 관련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연구자는 연구자 본인과 연구 대상을 철저하게 분리하여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매우 충실한 연구자의 입장 애서 가치중립적 객관성을 가지려고 노력했다는 연구자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연구자는 본인과 연구 대상의 일상적 차이와 그것에서 오는 편견을 배제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과도해진 나머지 정작 중요한 관련 짓기를 하지 못하는 과오를 저지르게 되었다.

 

아무리 그 분야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해도 연구 대상의 일상에 파고들지 못한 연구자는 외부인에 불과하다. 성공적인 참여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연구 대상의 일상에 편입되어 그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장 조교들이 사당동에 방을 얻어 직접 지역 주민이 된 것이 그 예이다. 지역 주민들과 이야기하고 가끔은 그들의 일을 돕기도 하며 라포를 형성하는 모습은 참여 연구를 위한 좋은 시작점인 것처럼 보이고, 연구자 역시 그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나는 라포 형성에서의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실제로 한 촬영 조교는 거리 조정에 실패하여 연구자에게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 미안하다는 이유로 중요한 장면을 촬영하지 못하기도 했다. 이것은 연구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기에 벌어진 일이다. 

 

앞의 사례가 연구 대상에게 과도하게 이입해서 일어난 결과라면 그 반대의 경우도 살펴보고자 한다. 연구자와 조교들이 취하는 방관자적 입장은 가끔 비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느낀 대목은 일진회의 아이들이 한 아이를 괴롭히는 장면에서 그들의 반응이었다. 무심코 지나려다가 찍어두자 는 입장으로 바뀐 것은 아이를 구하려는 정의를 실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연구 자료로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당시 사당동의 분위기를 객관적으로 담아내야 하는 것이 연구자의 역할이라지만 비행을 막고 괴롭힘 당하는 아이를 구하려는 일마저 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연구란 무엇인가? 하고 회의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다. 

 

또한, 동네에 철거를 위한 강압적 유혈 사건이 일어난 뒤의 촬영분에서 연구자가 무서워서 못 왔다 고 언급한 부분도 인상깊었다. 연구자는 객관적 사실을 담아내기 위해 사당동으로 향했지만, 진정으로 연구자가 필요했던 순간에는 그 공간에 부재했던 것이다. 당시 사당동이 얼마나 위험했으면 연구자가 오지 못했을까? 라는 연민의 감정이 들면서도 동시에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며 연구해야 하는 것이 연구자의 몫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혼란에 빠지지 않으려면 연구자는 연구 대상의 삶에 어느 정도로 뛰어들어야 하는지 그 정도를 미리 정해 놓아야 한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일상의 구성원처럼 어색하지 않아야 하지만 구성원 되지는 못 하는 연구자의 입장이 모호하다고 생각했다. 연구자 역시 연구에서의 중립성은 늘 숙제이며 이율배반적 이라고까지 표현했다. 특히나 철거 재개발을 둘러싼 이중적인 감정은 연구자에게 혼란을 가져다 준다. 객관적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보고서를 위해 철거 재개발이 제 시간에 이뤄지기를 바라야 하지만 라포를 형성한 입장에서는 주민들을 위해 철거가 미뤄지기를 바라야 한다. 이러한 딜레마적 상황이 적합한 연구자의 입장이 어디일까를 고민하게끔 해 주었다.

 

책을 읽기 이전의 나는 연구자의 역할이 1) 연구 주제에 대해 사전 조사를 하고 2) 객관적으로 연구 대상을 관찰한 후 3) 일반화시키는 것에 국한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구자가 토로하는 어려움을 듣고 참여 관찰 연구가 생각보다 만만찮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연구자는 연구를 시작하며 관할 파출소에 자진 신고를 한 후 공식적으로 협조 공문 까지 띄우며 연구가 적법한 절차에 거친 것임을 공권력으로써 증명했다. 그럼에도 현장 조교가 불온 세력으로 의심받아 조사를 받으러 가는 것을 보며 연구 대상과 라포를 형성하고 연구 목적의 행동을 해도 결국엔 그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기에 더 쉽게 의심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구자와 연구 대상의 삶의 배경과 연구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기에 이러한 문제는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외관상 확실하게 보이는 부분까지 꼼꼼히 짚어 내는 것도 연구자의 역할이었다. 사당동의 경우 토박이보다는 다른 지역에서의 강제 철거로 옮겨 온 이주민이 많았으므로 많은 현장 자료들이 피상적이었다는 문제점이 있다. 콘크리트 집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진흙집이었다는 것이 그 예이다. 집이 무엇으로 지어졌는가는 연구자가 아닌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연구 대상의 삶에 일부 편입된 연구자의 입장에서 집의 소재는 삶의 터전을 옮기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실제로 진흙집이 일부 무너져 내려 강제 철거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이사를 떠난 가족의 사례를 보면 이러한 사소해 보이는 것도 연구에 큰 변수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연구자가 가장 고심했고 나 또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연구자로서의 윤리 이다. 책에서 언급한 유혹은 달마다 오르는 입주 분양 우선권이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도 입주 분양 우선권은 많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힘을 갖는다. 입주 분양 우선권을 통한 이익은 현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큰 유혹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구자와 조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이 연구 대상과의 라포를 형성한 것이 이러한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사당동 사람들의 치열한 삶을 가지고 돈놀이를 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미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연구 목적이 연구 주제를 연구하는 것 에 그치지 않고 연구 주제의 사람들에게서 배움을 얻는 것 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현장 참여 연구의 의의가 밝혀진다. 전자의 경우처럼 연구주제를 단순히 연구하려는 목적이었다면 굳이 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만약 나간다고 해도 사전에 조사한 것과 일치하는지의 여부만 확인하고 돌아오면 된다. 하지만 <사당동 더하기 25>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연구자는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연구 대상들과 함께했다. 이는 연구의 목적이자 본질이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에 있다는 것을 그대로 실현한 것이다.

 

책에서는 사당동 더하기 22를 근거로 mbc <우리는 한국인 : 다문화 희망 프로젝트>가 현실과 다르다는 것을 꼬집고 있다. Mbc 같은 메이저 방송사조차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을 방영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고 곧이어 연구자의 말처럼 실제의 재현은 가능한가? 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내린 나름대로의 결론은 방송에서는 실제의 재현이 힘들다 는 것이다. 사람들이 방송을 보는 이유는 대개 현실이 팍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송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서라도 이상향을 노래해야만 한다. 하지만 사당동 사람들의 삶은 현실 중의 현실이었다. 영주 씨의 아내이자 베트남 여성인 지지 씨. 그녀가 다문화 교사로 취직하지 못하는 것은 고졸이라는 낮은 학력 때문이다. 다문화 교사가 되기 위해 요구되는 대졸 이상의 학력은 가난과 얽혀 있다. 결국 가난하면 교육을 받을 수 없고 교육을 받지 않았으면 훗날 다문화 교사가 되어 생계비를 벌 수조차 없는 것이다. 이런 현실이 희망차고 달콤하게 그려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방송은 왜곡된다.

        

가난과 언어 능력 간의 연관성은 앞서 읽었던 <불평등한 어린시절>에서도 다뤘던 주제이다. 충치라는 단어를 몰랐던 웬디 엄마의 모습과 장점이라는 단어를 몰랐던 영현이의 모습은 시대와 나라가 다름에도 겹쳐 보인다. 하지만 가난할수록 언어 능력이 떨어진다 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단지 그런 경향이 있다고 조심스레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것은 언제나 예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책에 등장한 한 여성은 초등학교를 중퇴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서를 통해 언어 능력을 길러 대졸자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었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사례가 극히 예외적인 사례였을 수도 있지만, 그녀의 존재는 내게 표본을 통해 지배적 경향성을 얻었어도 그것을  쉽게 사회학적 사실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또한 지금 일자리를 잃으면 사흘은 놀아야 한다 는 사당동 청소년의 말에서 사흘 을 3개월 로 오독한 대학원생의 모습은 이들 사이의 사회적 배경이 다름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실직의 기간이란 개월 수로 끊기는 비교적 장기간의 것이다. 하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당장 내일 일을 하지 못하면 그것이 실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배우긴 배워야 하는데 배울 동안에 돈을 못 벌잖아요 라는 덕주 씨의 인터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정 수준 이하로 가난해지면 배움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은 가난이 구조적으로 대물림 될 것임을 암시한다. 같은 맥락에서 가난한 청소년들이 범죄에 대한 처벌로 사회 봉사 처분을 받아도 도망 다니는 이유는 사회 봉사를 하면 그 동안 일하지 못해 결국 다음날 굶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당동 사람들은 가부장적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근거는 연구자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사당동 사람들은 교수는 남성이라는 전제 하에 연구자의 신분을 의심하고 아줌마 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는 가난과 관련이 있을까? 

 

덕주 씨의 인터뷰에서 결혼하면 안 때릴 수 없잖아요 라는 발언이 나왔다. 이러한 발언이 누나 은주 씨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는 것을 감안해 봤을 때 덕주 씨는 매형 종수 씨가 누나 은주 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덕주 씨가, 나아가 사당동의 아이들이 폭력에 익숙한 상황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사당동의 아이들은 부모의 다툼과 폭력을 일상처럼 보고 자란다. 맨발의 여성을 끌고 가는 남성의 뒤를 울며 쫓아가는 아이를 묘사한 대목, 선미 아빠에게 맞아 코뼈에 금이 간 선미 엄마의 사례, 남편의 폭력에 못 이겨 바람이 나 가출하는 유부녀들의 사례가 그 근거가 된다.

 

약간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불평등한 어린시절> 에서 사회 경제적 계층이 낮을수록 아이의 교육에 체벌을 사용했던 것과 이러한 폭력을 묶어서 보고 싶다. 사당동의 여성들이 모여 남편의 경제적 무능을 흉보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사당동의 남성들은 사업 실패나 질병 등의 이유로 경제적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80년대라는 시대적 분위기는 생계 부양자로서의 남성 모델이 지금보다 굳건하던 때였다. 결국 돈을 못 벌어 이빨 빠진 호랑이 나 다름없는 사당동의 남성들은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행사했다. 이는 부모의 권위를 유지하고 아이를 순종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해 체벌을 사용하는 <불평등한 어린시절>의 빈곤층 부모와 닮아 있다. 이 두 사례를 통해 사회 경제적 계층이 낮을수록 단순하게 폭력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은주 씨의 남편 종수 씨의 인터뷰에서도 남성 중심적 시선이 드러난다. 종수 씨는 나라에서지원을 받고 은주 씨가 가출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단으로 임신을 시켜 버리면 어떻겠느냐 고 물어 온다. 나는 이 대목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경제적 도움을 받고 아내를 집안에 붙잡아 둘 수단 으로서의 아이에게 얼마나 큰 관심과 사랑을 줄 수 있을까? 또한 임신으로써 아내를 집에 묶어 둬 아이를 키우는 역할을 다 하게 하려는 것은 구시대적인 남성의 생각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교 중 한 명은 은주 씨 가족이 배달 음식을 자주 시켜 먹는 것을 보고 가난한 사람의 염치없음 이자 복지병 의 폐해라며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만 맞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은주 씨 가족은 수입이 불안정했으며, 곗돈은 미리 다 썼고, 빚 위에 빚이 있는 상태였다. 설사 은주 씨 가족의 재정 상태가 이리 열악하지 않았다고 해도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의 사치 에 유독 가혹한 것 같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에 순응하며 욕심 없이 살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욕심 없이 가난에서 벗어나라는 말은 잔인한 모순이다. 가난은 이미 노력으로도 끊어 내기 힘든 구조적 굴레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비슷한 궤적으로 흘러갔다. 아이들은 방치되어 자랐다. 기욱이와 명자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형제 자매 간 싸움도 빈번했다. 부모 자식 간 긴장관계도 존재했다. 이러한 어두운 이면은 빈곤할수록 가족 간 유대관계가 두터웠던 <불평등한 어린시절>과는 차이를 보인다. 나는 <사당동 더하기 25>의 경우가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다 잘 반영했다고 생각한다. 마음의 여유와 사랑은 최소한의 삶을 위한 의식주가 보장되었을 때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당동의 일부 사람들은 가난의 굴레를 끊기 위해 노력한다. 자식의 교육에 투자하여 계층을 상승시키고 끝내는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지지 씨의 사례에서 언급했듯이 가난하면 교육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한 맥락에서 은주 씨네 막내 영남이가 태권도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 준 돈의 원천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수업료의 절반인 5만원은 사당동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이 영어 과외를 한 돈의 일부였다. 그들의 처음 바람대로 같이 식사를 하거나 집에 초대했다면 가난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시적 경험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익명으로 매달 돈을 보내기로 결정하면서 가난한 아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긍정적 효과를 거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일부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도시 빈민층은 노동밖에 할 것이 없고 모아 놓은 목돈도 없다. 과거에도 찾기 힘들었던 빈곤층의 사회 이동 출구는 자본주의의 영향이 커지기 시작하며 거의 봉쇄되기에 이르렀다. 즉, 가난은 출구 없는 빈곤 재생산의 조건이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가난의 결과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떠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금선 할머니의 빈곤은 전쟁과 그에 따른 사회적 대책이 없는 것에서 시작되었고, 수일 아저씨와 영주, 은주, 덕주 씨를 거치며 구조적으로 대물림되고 있다. 이는 가난이 사회구조적 문제이며 정부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정부는 구조적 충격이 왔을 때 빈곤층에게 충격이 그대로 흡수됨을 인지하고 빈곤층 복지를 위한 근본적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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