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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문명
도서명
저자/역자
정수일
출판사명
창작과비평사 2002
출판년도
2002
독서시작일
2011년 01월 16일
독서종료일
2011년 01월 16일
서평작성자
**

서평내용

이슬람의 과학과
사상 화학자가 만드는 약, 의사의 기술, 컴퓨터에 의한 계산, 경제전문가가 세우는 예측 등에 의존하여 생활하고 있는 현대인은 흔히
생각하기보다 훨씬 많은 것을 중세의 이슬람 과학자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9세기부터 14세기까지의 사이에 이슬람의 화학자, 의사,
천문학자, 수학자, 지리학자 등은 그리스 과학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후세에 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 영역을 확대하여 근대과학 많은 부분에서
기초를 다지는 데 크게 공헌했다. 현재 서구에서 사용되고 있는 “알제브라”(대수)에서 “제니스”(천정)에 이르는 많은 과학용어가
아라비아어에 유래한다는 것만 생각하더라도 지식을 넓힌다든가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는 분야에서 이슬람의 과학자가 얼마나 활약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 과학의 대상은 그저 단순히 인간을 둘러싼 자연계의 사상만은 아니었다.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또 인간이 사는
사회에 대해서도 투철한 분석을 가했다. 이슬람 과학은 아주 먼 곳에까지 명성을 떨쳐 지식을 구하는 서구인은 한 사람 남김없이 탐구 정신을
불태워 이슬람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처음 이들 학자를 매혹하고 있던 큰 학문적 자석은 이슬람의 수도 바그다드였다. 813년부터
833년까지 제국을 통치한 칼리프는 마문은 바그다드에 “지혜의 관”이라는 도서관, 번역소, 학교로 된 학술센터를 창설했다. 전설에 의하면
마문은 그러한 센터를 만드는 것을 처음에는 주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그도 신이 다스리는 우주에 이성을
적용하는 것이 허용된 수 있을 것인지 어떤지 미심쩍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밤 칼리프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령이
그에게 나타나 이성과 종교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증한 것이다. 비로소 안심한 마문은 센터의 창립을 명령했다고 한다. “지혜의 관”이
설립되고 나서 75년 동안에 그리스인을 비롯한 고대민족의 위대한 사상이 속속 아리바이아로 번역되었다, 그 가운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표적인
철학서, 플라톤의 몊가지 주요 작품,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 아르키메데스, 그리고 힙포크라테스, 디오스코리데스, 갈레노스 등 유명한
그리스학자의 주요 저작, 그밖에도 페르시아나 인도의 수많은 과학상의 업적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번역의 원본이 된 사본의 일부는 모슬렘이
비잔티움과 페르시아를 정복했을 때 전리품으로 획득한 것이었으나 그후 일부러 찾아낸 작품도 있었다. 마문은 그리스의 서적을 찾기 위해 멀리는
콘스탄티노플에까지 사람을 보내어 그것들을 바그다드에 가져오게 하고 아라비아어로 번역케 했다고 한다. 열성적인 학자들에 의해 “지혜의
관”으로부터 엄청난 수의 번역서가 간행되고 지식상의 발견을 지향하는 대항해시대의 막이 열렸다. 그들 중에서 특히 뛰어났던 학자의 한 사람이
주로 갈레노스의 저작의 번역자로 알려진 후나인 이븐 이스하크이다. 페르시아 서부의 도시 히라에서 태어난 후나인은 바그다드에 나와 의학을
공부했다. 그를 가르친 것은 나중에 이슬람 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페르시아의 유명한 준디샤푸르 의학교 출신의 의학자였다. 그러나
어느 날 탐구심에 불타는 청년 후나인은 선생에게 질문을 퍼부어 그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도대체 히라 출신이 의학은 배워서 뭣하겠다는
거야. 거리에 나가서 환전상이나 해 먹어.: 성난 선생은 이렇게 말하고 그를 파문했다. 후나인은 눈물을 머금고 은사 밑을 EJ났다. 그러나
지식을 탐구하려는 그이 결의는 점점 더 강해지기만 했다. 그는 다른 선생 밑에서 의학공부를 계속하며 그리스어를 배우고 학자들에 고용되어
그리스의 서적을 찾는 일을 했다. 어느 때 그는 갈레노스의 흩어져 있는 저작을 찾아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의 끈기는 대단한 것이어서 그
서적을 찾아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시리아에까지 발을 뻗쳤다. “그런데도 나는 그 절반을 다마스커스에서 발견한 외에는 아무런
실마리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렇게 탄식하고 있었다. 얼마 후에 후나인은 칼리프의 시의의 조수로 임명되고 곁따라 “지혜의 관”의
감독을 명령받았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의 아들이나 조카를 비롯한 약 90명의 제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번역사업의 일체를 관리했다. 그들은
믿을 수 있는 서적을 만들기 위해 놀랄 만큼 까다로운 일을 했다. 어떤 때는 그리스어의 책을 우선 시리아어로 번역하고 그것을 다시
아라비아어로 옮기는 번거로움을 치렀다. 이것은 후나인이 시리아어에 가장 능란했기 때문이며 아라비아어로 옮길 때는 아라비아어에 특히 능숙한
조수 한 사람이 번역을 맡았다. 그들은 이처럼 대단한 힘을 기울여 되도록 정확한, 결정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책을 만들어 내려고 애썼다.
후나인의 작업태도는 매우 높이 평가되어 칼리프는 그에게 보수로서 번역한 책과 같은 무게의 금을 주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당시 학문이
얼마나 중시되고 있었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후나인은 번역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쓴 의학서도 많이 출판했다. 후나인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룩된 지식의 집성과 번역이라는 대사업은 후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주로 시칠리아와 에스퍄냐를 거쳐 서구에 전해지고 근대과학,
특히 근대 의학의 기초 형성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슬람의 과학 전체를 뒷받침하고 있던 것은, 세계는 얼핏 보아 혼돈된 듯 하지만 그 속에는
근본적인 질서가 있다는 그리스적 신념이다. 이 질서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 이해할 수가 있는 보편적인 법칙에 지배되고 있고, 일단 그러한
법칙을 파악할 수가 있으면 모든 현상이 비록 아무리 기이하게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쉽게 이해된다. 천문학을 예로 든다면 만일 인간이
천체를 저마다의 위치에 받쳐주고 있는 법칙을 알게 된다면 먼 장래에 있어서도 임의의 별의 위치를 미리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슬람
과학자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우주에 관한 지식을 가리켜 아라비아어에서는 “ 팔사파”라고 한다. 이 말은 “지식을 사랑한다” 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의 “필로소피아”에 유래하고 있다. 팔사파는 우주에 관한 실로 원대한 개념이며 그리스어의 어원의 뜻 그대로 이론상, 실제상을
막론하고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이 거기에 포함된다. 세계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려는 그 연구대상은 의학이나 자연과학에만 그치지 않고
철학이나 그 밖의 많은 비종교적 분야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처럼 전세계의 참된 성격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학자들은 한 사람이 여러 방면에
걸친 학문을 추구하게 된다. 그들은 한 가지의 좁은 분야에 파묻힌 전문가가 아니라 의학, 화학, 천문학, 수학, 논리학, 형이상학,
나아가서는 음악이나 시 같은 여러 분야에 통달한 과학자 겸 철학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학자는 수에 있어서도 비교적 적었고 그 한없는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대개 궁정이나 부자를 후원자로 갖고 있었는데, 그 학술활동에 의해 이슬람 세계의 모든 도시의 지적 풍조를 크게
자극했다. 그들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그 해박한 지식을 흡수하기 위해 제국내의 도처로부터 많은 학생이 그들에게로 모여 들고 있었다.
학문은 어디까지나 그 자체의 고상한 목적을 위해 연구되고 있었으나 그 성과는 흔히 일상생활에 응용되어 실익을 낳았다. 가령 수학은 우주의
복잡한 문제를 풀기 위해 사용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상업, 측량 같은 일상적인 분야에도 응용되었다. 마찬가지로 천문학은 종교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모슬렘이 예배시간, 멕카의 방향, 라마단의 새 월출시간 등 중요한 사항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천문학
덕분이었다. 천문학은 또 육상 및 해상의 여행자가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슬람 문명은 그야말로 과학의
꽃이었으며 그 발전된 과학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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