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일본에서 괴테 연구 일인자로 불리는 히로바 도이치가 결혼 25주년을 맞아 가족들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던 중 여러 가지 명언이 적혀있는 홍차 티백의 꼬리표에서 이때까지 들어본 적 없는 괴테의 명언을 발견하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그 문장은 이러하다.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도이치는 이 문장의 출처를 찾기 위해 괴테의 전집을 샅샅이 훑고도 찾지 못하자 동료 학자들에게 메일을 돌려 문장의 근원을 찾고자 한다. 도이치는 명언 사이트에 있는 문장을 가져온 것이라는 티백 회사의 말에 명언 사이트를 찾아보고 출처라고 적힌 블로그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 독일에 가게 된다. 명언의 출처를 찾는 과정에서 도이치는 자신이 원하던 것이 명언의 출처가 아니라 더 이상 인용이 아닌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 의미가 퇴색되기 마련이다. 도이치에게는 독일 유학 시절 하숙집 이웃인 요한이 해줬던 말인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가 그러했다. 청춘 시절 유희의 상징이자 무한한 가능성을 뜻했던 이 말은 시간이 지나자 다른 사람이 괴테의 말을 인용할 때의 출처를 뭉뚱그리는 근거가 되고 자신의 의견을 괴테의 권위를 통해 밀어붙이고자 할 때 도이치를 좀먹는 저주가 된다. 시간이 더욱 지나면 어느 순간부터는 떠올리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라는 미지의 명언을 만났을 때 도이치는 이 명언을 그저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로 대충 얼버무릴 수 없겠다고 직감한다.
도이치의 명언 찾기 과정에서 명언의 진위여부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를 깨닫게 하는 여러 주변인물이 등장한다. 첫 번째 인물은 도이치의 동료 교수인 시카리 노리후미 교수이다. 시카리 교수는 요약형, 전승형, 위작형이라는 자신만의 명언론을 펼치며 명언이 실제로는 출처가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한다. 명언은 익명성과 무개성을 조건으로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와 같은 시카리 교수의 말에서 도이치는 명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은 도이치가 논문 지도를 봐주게 된 쓰즈키이다. 쓰즈키의 논문을 봐준 다음 두 사람은 ‘잡탕’이라는 술집으로 향한다. 쓰즈키는 도이치가 수업 중 이야기했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라는 말에 대한 공상에 가까운 잡담이 인상깊었다고 밝힌다. 쓰즈키는 “전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모든 것을 말하기란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괴테는 정말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구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 그게 저에게 힘이 되었어요.”라고 말한다. 도이치는 쓰즈키를 통해 <파우스트>에서 괴테가 개인이 가지는 한계까지 포함해 모든 것에 대해 말하고자 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하지만 도이치 자신은 쓰즈키와의 대화에서 괴테처럼 모든 것에 자신의 언어로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입증된 과거에 자신이 썼던 문장을 반복하며 더 나아가고 있지 못함을 발견한다.
세 번째는 명언에 대해 고민하며 잠든 꿈에 등장한 괴테이다. 꿈 속에서 도이치 자신의 저서 <괴테의 꿈>을 들고 방문한 미지의 공간에서 도이치는 괴테를 만나 자신의 저서를 괴테에게 직접 전달한다. 괴테는 도이치의 설명을 통해 자신 이후의 학자들이 자신에 대해 쓴 기록을 읽어본다. 이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언제나 똑같군. 여러 가지 상태가 항상 반복되지. 어느 민족이건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살고, 사랑하고, 느끼고 있어. 모든 것은 이미 말해졌고, 우리는 기껏해야 그것을 다른 형식이나 표현으로 되풀이할 뿐이야.” 그리고 꿈 속에서 도이치는 괴테가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꿈에서 깨어난 도이치는 꿈 속에서 들은 출처가 불분명한 괴테의 명언을 방송용 원고에 추가하며 학자로서는 해서는 안될 일을 저지르며 자유와 짜릿함을 느낀다. 도이치는 원고에 명언을 추가한 후 방에서 나와 시간을 확인한다. 도이치의 자택에 있는 시계는 고장이 나 10분이 더 빠르거나 느린 상태이다. 이때까지의 도이치는 시계가 고장난 것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으며 고쳐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꿈을 꾼 이후에는 시간의 정확성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다. 사회적으로 공인된 말이거나 명언을 인용하며 솔직한 자신의 의견을 전하지 못한 채로 살던 도이치가 꿈 이후로 괴테의 명언을 원고에 추가하며 자신만의 확실한 언어의 중요성을 인식했음을 고장난 시계를 통해 보여준다.
네 번째는 장인어른이자 도이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 운테이 마나부이다. 연초를 맞아 장인을 만나러 간 도이치 가족은 운테이 마나부의 여든여덟 살 기념 논문집을 읽게 된다. 논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좀 더 빛을」을 읽고 느낌만으로 쓴 글이라는 인상을 받으며 ‘선생님도 나이를 먹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이치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장인어른에게 괴테의 명언에 대해 질문한다. 운테이 마나부도 괴테의 말에 대해 분명한 출처를 알려주지는 못하지만 말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하지만 말이란 끝까지 불편한 도구야. 도무지 익숙해지는 법이 없거든. … (중략) 그걸 대신할 도구를 도통 찾을 수가 없어서 계속 쓰고 있을 뿐이야.” 도이치와 헤어질 때는 그 말이 진짜라면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해준다. 도이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말이 진짜’의 의미는 ‘도이치의 경험을 통해 실감을 얻은 진짜 도이치의 말이라면’이라는 것에서 운테이 마나부가 여전히 도이치의 스승인 면모를 보여준다.
다섯 번째 인물은 도이치의 딸인 노리카이다. 노리카는 본인이 운영 중인 명언사이트를 통해 아빠가 명언을 찾는데 도움을 준다. 도이치는 이 과정에서 노리카가 명언 사이트를 운영 중이라는 것과 남자친구가 자신의 제자이기도 한 쓰즈키라는 것을 알게 된다. 노리카와 쓰즈키의 첫 만남은 도이치가 가진 자신만의 언어에 대한 고민을 청춘들다운 명랑함을 동반해 집약한 것처럼 느껴진다. 대학 간 독서 모임에서 만난 두 사람은 독서 모임에서 발표를 마친 노리카에게 쓰즈키가 ‘그렇게 인용만 하지 말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게 어때?’하고 주의를 주면서 인연이 시작된다. 이에 분노한 노리카가 ‘언어 시스템 자체가 인용이야. 보르헤스도 그렇게 말했거든.’라고 쏘아붙였지만 쓰즈키가 ‘논쟁에서 권위를 방패로 쓰는 사람은 지성이 아니라 기억력을 쓰는 것에 불과해. 다빈치도 그렇게 말했어.’라고 맞받아치며 노리카의 흥미를 자극한다. 노리카와 쓰즈키의 도움을 받아 티백 회사에 메일을 보내며 도이치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괴테가 그러했듯 세상의 일에 자신의 언어로 의견을 표명하는 것임을 꺠닫는다.
도이치는 티백 회사가 알려준 괴테의 명언의 출처인 블로그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 가족과 함께 독일에 방문하는 과정에서 부인인 아키코와 노리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그들에 대해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며 사랑을 삶 속에서 실천하게 된다. 이를 통해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이라는 말은 실감을 얻은 자연스러운 도이치의 언어가 된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명언이 많이 인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자신의 언어로 말할 때 비로소 그 말이 진짜가 된다.’라는 것에서 전개방식이 흥미롭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 책은 굉장히 지적인 소설이다. 수많은 학술적인, 혹은 문학적인 인용들과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지적이다’라고 한 것은 아니다. 인용구들을 주인공들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여서 그것을 뒤섞고 이야기 속에 체화시키는 문학적인 방식 자체가 지적이라고 본다. 많은 인용구들이 사실은 주인공의 삶과 굉장히 밀착되어 있고 주인공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그런것들을 통해서 극복하거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끌어들인다는 측면에서 자연스러운 작법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작가가 이토록 자신만의 언어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앙일보와 이메일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작가 스즈키 유이는 열 살 때 동일본 대지진을 목도했다고 밝힌다. “신뢰할 수 없는 말들이 떠도는 재난 이후의 혼란을 겪으며, 절대적 진실이란 없음”을 느꼈다. 이후 자신만의 언어를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고 한다. 작품 속에서도 동일본 대지진에 대한 회상이 등장할 정도로 작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현상을 더욱 심화될 것이지 덜 해질 것이라고 예측되지 않는다. 과도한 정보는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고 자신의 언어를 잃게 만든다. 더욱이 일부러 자신의 작품에 날조 논란을 만들어 실패를 실험하고자 한 시카리 교수의 행보가 우리 사회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학문을 파괴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고발하고 싶은 것도 아니며, 오히려 용인하고 싶습니다. 저는 학문이란 실패와 오류의 연속이라고 봅니다. 실패와 오류야말로 다양성의 근간이지요. 신화와 언어의 다양성이 곧 실패와 오류입니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는 실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크게 실패해 드렸습니다.”(p.232) 누구나 실패를 한다. 그러나 지금만큼 실패에 관대하지 못한 시대가 없다. 정보의 홍수로 인해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빠르고 간단하게 파악할 필요성을 느끼고, 다른 사람의 한 면모, 한마디를 통해 그 사람 전체를 짐작한다. 실패를 사회적으로 용인하지 못하니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보다는 유명학자의 말을 인용하고 근거가 충분한, 이미 주류로 여겨지는 의견만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며 컴퓨터나 AI가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컴퓨터가 할 수 없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실패와 실수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실패와 실수를 통해 놀라운 발전을 이룩해왔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더 많은 실패가 더 많은 다양성과 발전을 낳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만의 입장을 정립하고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 ‘나’를 잃어버리기 쉬운 시대이지만 그럴수록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수많은 ‘나’를 존중하기에 ‘남’의 용기 있는 실패를 용인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