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름은 유난히 길었다. 후덥지근한 날을 특히 싫어하는 나는 계절이 이미 가을로 넘어갔는데도 “왜 아직도 안 선선해지지?”라며 계속 투덜거렸다. 더운 저자는 그런 나에게 우리가 기억하는 가을은 “딱 시원했던 그 며칠뿐”이라며, 그 안에도 다양한 절기가 있다고 말한다. 것은 식히는 시간이 필요하고, 낮엔 여전히 덥더라도 저녁 공기 속엔 서늘함이 조금씩 스며든다고. 생각해보니 나는 그런 미세한 변화를 늘 놓치며 살아왔다.
에세이를 읽은 게 꽤 오래된 일처럼 느껴진다. 중학생 때는 가장 가까웠던 장르였는데, 필사를 시작한 뒤부터 책에서 ‘무엇을 반드시 얻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며 에세이와 소설을 자연스레 멀리했다. 이번에도 익숙한 방식대로 어려운 과학책을 고를까 고민하다가, 유난히 지쳐 있던 마음이 ‘제철 행복’이라는 표지에 붙잡혀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앞둔 옛사람들의 마음이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는 사실이 못내 좋다. 요행을 바라기보다 삶에 성의를 다하여 좋은 기분을 챙기고, 겨우내 언 마음을 녹이려 했던 사람들.”
‘입춘’ 편에서 소개된 ‘아홉차리’ 풍습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입춘날 각자 맡은 일을 아홉 번씩 반복하는 것 — 설거지도 아홉 번, 숙제도 아홉 번, 일기도 아홉 번. 효율만 따지면 쓸모없고 번거로운 일이지만, 인간은 효율을 위해서만 사는 존재가 아니다. 그 당연한 사실이 오랫동안 잊혀 있었다는 게 안타까웠다. 성실을 몸으로 길러냈던 조상들의 방식을 보며, 우리가 놓치고 있던 어떤 기본을 새삼 떠올릴 수 있었다.
“제철 행복을 미리 심어두는 건, 시간이 나면 행복해지려 했던 나와 작별하고 생긴 습관이다. 그때 나는 ‘나중’을 믿었지만 그런 식으로는 바쁜 오늘과 바쁠 내일밖에 살 수 없었다.”
바쁘게 살다 보면 나를 위한 시간을 내기가 가장 어렵다. 나에게는 애증의 대상인 한국에서, 그리고 작년의 호주 생활을 지나며 우리가 얼마나 정신없이 움츠러들어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이런 사회에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면서도, 정작 나를 위한 시간에는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우리 모두 조금만 더 멈추어 주변을 바라보고, 거기서 행복을 길어 올릴 수 있기를.
책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나를 위한 시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나는 혼자인 순간을 좋아해 독서도, 혼자 카페에 가는 일도 즐겼지만, 학기가 시작되고 일이 쌓이자 그런 시간을 자연스레 미뤘다. 친구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건 쉬운데, 나 자신에게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나.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나를 위한 시간’을 계속 뒤로 미루면, 그 끝에 정말 행복이 있을까.
우리는 나아가는 법을 끊임없이 배워왔지만, 이제는 멈추는 법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그런 배움을 조용히 일깨워준다. 계절의 속도를 따라가며 스쳐 지나가던 순간들을 다시 바라보게 하고, 사소한 반복과 기다림 속에서 삶이 천천히 익어가는 과정을 곁에서 보여준다. 그래서 더욱 지금 우리의 일상에 꼭 필요한 책이라 자신 있게 추천하고 싶다. 계절의 속도를 따라가며, 지나치는 순간들을 다시 바라보는 일. 그 사소한 반복과 기다림 속에서, 내 삶의 ‘제철 행복’도 천천히 익어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