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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함 속에 남은 얼굴들
도서명
저자/역자
헤르만 헤세
출판사명
민음사
출판년도
2009-01-20
독서시작일
2025년 09월 20일
독서종료일
2025년 09월 24일
서평작성자
김*민

서평내용

 

올해 나는 처음으로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접했다. 그래서 헤세의 이름은 오래전부터 익숙했지만, 직접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4월에는 『싯다르타』를, 9월에는 『데미안』을 읽었다.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모호함이었다. 분명 문장은 아름다웠지만, 그 안에 담긴 상징과 비유는 쉽사리 해석되지 않았다.

특히 『데미안』은 기독교적 배경에 크게 기대고 있는데, 나에게는 그 세계관이 낯설고 답답하게 다가왔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을 때는 오히려 신을 인간적인 존재로 느끼며 흥미롭게 받아들였는데, 『데미안』은 너무 모호해 차라리 막혀 있는 듯했다. 나의 지식 부족에서 비롯된 답답함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이 작품이 어렵게만 느껴진 이유였다. 오랫동안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아온 이유를 단번에 체감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곱씹을수록 그 모호함 자체가 『데미안』의 중요한 미덕이었다.

『데미안』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을 꼽으라면 단연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에 대한 싱클레어의 사색 대목이다. 솔직히 헤세의 비유적 언어 속에서 정확히 어떤 의미를 겨냥하는지 쉽게 파악하기 어려웠다.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 카인, 베아트리체와 같은 상징들이 소설의 고유한 맥락 속에서 새롭게 획득하는 추상적인 의미를 명확히 해석하는 데 깊은 숙고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은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마도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도, 무언가 커다란 메시지가 추상적인 울림으로 숨겨져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모호함이 공존하는 순간들이 바로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일지도 모른다.

싱클레어의 사춘기를 따라가면서 나는 공감보다는 거리감을 느꼈다. 그는 ‘밝은 세계’에서 ‘어두운 세계’를 처음 마주하고 혼란을 겪는다. 하지만 나의 사춘기는 그와 달랐다. 나는 언제나 빛을 본다면 그 뒤를 스스로 의심하고 어둠을 찾아냈고, 어둠을 마주하면 다시 빛을 발견해 내곤 했다. 나에게는 어느 한쪽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전환의 순간이 없었다. 오히려 매일매일이 혼란이었고, 그렇기에 사춘기는 진정과 휴식의 시기였다. 세상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나만을 바라보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싱클레어가 내면의 분열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 애쓰는 과정은 나와는 다소 어긋나 있었다.

나는 그의 찌질함에서 묘한 매력을 느꼈다. 싱클레어가 주인공으로서는 매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성적이고 완벽한 듯한 데미안의 내면에 찌질한 싱클레어가 있었다면 더 힘 있게 이야기가 전개되었을 것 같았다. 카프카의 『변신』 속 인물들처럼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모습, 혹은 카뮈의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자기 방황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인물들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싱클레어는 그에 반해 너무 의식적이고, 너무 상징적으로 그려져서 다소 지루했다. 하지만 그의 불안정한 모습은 인간적이었고, 그래서 더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데미안』의 인물들은 전부 모호하고 때로는 신비로웠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내면에 잠재된 또 다른 자아이자 진실이고, 에바 부인은 성모 마리아처럼 성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성적 매혹을 동시에 품은 완성된 자아이다. 아버지는 권위와 법을 그대로 상징하는 인물로 느껴졌다. 하지만 이렇게 너무 직접적으로 표현된 상징은 오히려 흥미롭기보다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차라리 『변신』의 그레고르의 아버지가 집에서는 절대적 권위자이지만 사회에서는 무력하고 비굴해지는 모습의 이중성이 훨씬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머니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양심의 상징으로, 밝은 세계의 순수성을 지키는 존재였다. 그러나 에바 부인은 어머니의 사랑을 품으면서도 아버지의 권위를 초월한 인물로 그려진다. 크로머와 피스토리우스 역시 각각 어둠과 빛의 거울로 기능하며, 결국 모든 인물이 싱클레어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 조각 같았다. 이런 점에서 『데미안』은 성장소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자아 탐구의 기록서이다.

자아 탐구의 여정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알을 깨는 새’의 비유였다. 이 문장은 안락할지 몰라도 성장을 가로막는 알을 부수고 미지의 영역으로 스스로 발을 내딛는 용기와 의지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신, 아브락사스, 즉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잠든 목소리로 나아가야 한다. 싱클레어의 알은 부모님의 보호와 도덕률이라는 ‘밝은 세계’인 딱딱한 껍질이었지만, 나에게 알은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완벽주의였다. 타인의 시선이나 외부의 기대보다 더 무서운 스스로에 대한 가혹한 질타였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고, 나의 희생을 통해 더 나은 해결법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내가 깨야 했던 알은 딱딱한 겉껍질이 아니라, 이미 깨진 껍질 속에서 내면을 감싸고 있던 투명한 막, 즉 양막이었다. 본인 통제권 아래 완벽해야 한다고 믿었던 자아라는 부드러운 감옥이었다. 싱클레어가 극적인 혼란과 충돌을 통해 알을 깼다면, 나의 ‘알 깨기’는 역설적으로 진정과 휴식의 시간을 통해 이루어졌다. 모두가 이해해 주는 사춘기라는 시기에 문을 닫고, 내가 나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라고 규정했던 모든 것을 놓았다. 하루에 사과 한 알을 먹고, 누워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공원에서 멍때리기를 반복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128쪽)

 

나태라는 이름의 방황이었지만, 동시에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모든 억압과 통제를 놓아버린 해방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생산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대로 쉬고 멈춰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몸으로 체득했다. 자기 통제를 멈춘 순간, 역설적으로 진정한 자아를 향한 성장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책을 다른 친구에게 쉽게 추천하지는 못할 것 같다. 요즘은 더 어린 나이에 더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로 방황하는 시대이기에, 『데미안』의 방식이 과연 그들에게 와닿을지 의문이 든다. 싱클레어가 겪는 사춘기의 혼란은 때때로 지나치게 극적이고 상징적이어서, 오히려 우리의 삶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현실보다는 추상적인 사유의 세계 속에 있는 듯한 이질감이었다. 내게 중학생쯤 되는 동생이 있다면 언젠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나 그가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망설임도 든다.

『데미안』은 그만큼 읽는 시기와 경험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데미안』은 감동적인 성장소설은 아니었다. 이해하기 어려웠고, 답답함도 컸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호함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무엇보다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가장 좋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책은 흔치 않다. 언젠가 삶의 경험이 더 쌓였을 때 다시 읽는다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 내 안에서 새롭게 드러날지도 모른다. 이번 만남이 어려웠던 만큼, 언젠가 두 번째 만남이 기대된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을 통해 우리 내면의 어둠과 빛을 추상적인 언어로 그려낸다. 당장의 독해는 어렵고, 상징은 때로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쉽게 읽히는 서사나 명확한 교훈을 기대한다면, 이 책은 상당한 문학적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 『데미안』은 마치 싱클레어의 고독한 성장 과정처럼, 독자에게도 인내와 집중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책을 선택하기 전, 자신의 내면 탐색에 뛰어들 준비가 되었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길 바란다. 『데미안』은 책을 덮는 순간부터 다시 시작되는 소설이다. 다만 그 여정이 모든 이에게 편안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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