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싱클레어가 겪었던 고통은 하나의 답으로 귀결될 수 없는 세상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소년 시절 싱클레어는 어머니와 누이가 살아가는 선의 세계를 동경했으며 자신 또한 그곳에 속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자신이 있어야만 하는 선의 세계와 자신이 절대 가까이해서는 안 될 악의 세계를 극단으로 인식하는 것은 사람에게 매순간의 끝없는 고민을 안겨주게 된다. 싱클레어가 유년시절 선의 세계에 향유하다가 청소년 시절에는 악의 세계에 몸 담갔다고 믿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세상으로 다시 달려가지만 결국엔 실패한 것은 정말로 정형화된 이상적인 세계는 외부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싱클레어가 자신이 경외했던 세계의 영상을 닮은 베아트리체를 사랑하며 그가 창조한 빛의 세계는 어머니의 세계에서 착안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는 아마 악의 세계와 선의 세계 그 위에 새로이 창조된 싱클레어만의 변증법적 세계가 아닐까 한다. 싱클레어의 변증법적 세계란 선과 악 그 어느곳에도 완전히 속하지는 않지만 그 둘을 모두 포용하고 초월하는 것이다. 이 세계의 탄생은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모두 포용하는 아브락사스를 싱클레어가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싱클레어의 변증법적 세계관 속에서 그려진 베아트리체의 초상화는 싱클레어가 그토록이나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무언가와 닮아있다. 바로 이 지점이 데미안이 강조한 자기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피스토리우스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그는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공명하는 아브락사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자였다. 카인의 문장을 지닌 이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 싶어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종교를 통해 도구적인 분석을 하는 것에 머문다. 그래서 싱클레어는 그를 “그의 직분은 어쩌면 나에게 해주었듯이 인간이 그 자신에게로 이르는 것을 돕는 일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신들을 제시하는 것, 그것은 그의 직분이 아니었다” 라고 서술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있던 피스토리우스 자신 또한 괴로워한다. 이것 또한 세계의 모순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종교의 사제가 되고싶음에도 과거의 종교적이고 성스러운 것에 집착하는 본능적인 모순.
”나는 운명을 동경하고, 운명을 두려워했지만, 운명은 늘 그곳에 있었다. 늘 내 위에 있었다“
”운명과 심성은 하나의 개념에 붙여진 두 개의 이름이다.”
하지만 싱클레어도 피스토리우스도 그러한 모순 때문에 고통받았지만 그들은 알고있었고, 깨달은 것이다.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이 외부의 강요가 아니라 가장 깊은 심성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말이다. 다만 피스토리우스는 이러한 길의 안내자였고, 싱클레어는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자였던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자신이 보고싶다면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것이 싱클레어가 동경하는 데미안의 자아는 곧 자기자신이 원하는 운명인 것이고, 싱클레어는 이제 자신의 내면을 끌어당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에 싱클레어의 내면 속에 데미안 또한 함께 존재한다고 말했다고 해석한다. 더 이상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아브락사스로 인도하는 외부의 열쇠나 안내자가 아니다. 싱클레어는 그 모든 이정표를 내면화함으로써, 이제 데미안 없이도 스스로 운명을 끌어당길 수 있는 주체적 존재가 되었다. 데미안을 닮았던 초상화가 이제는 싱클레어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