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은 주인공 와타나베가 비행기 안에서 비틀즈의 노래를 우연히 듣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시작한다. 와타나베는 고등학교 시절 친한 친구였던 기즈키의 죽음을 목격하며,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그는 삶의 무게와 허무함을 마주하고, 이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도쿄로 대학을 진학한다. 기차에서 우연히 기즈키의 연인이었던 나오코와 재회한 와타나베는 상실의 경험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나오코는 마음의 상처로 불안정한 정서가 심해지면서, 결국 요양병원으로 떠난다.
그 사이 와타나베는 대학에서 밝고 발랄한 미도리와 친해진다. 미도리 역시 어머니가 암으로 사망하고, 아버지는 뇌종양으로 병원에 신세 지는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렇게 이야기는 나오코, 와타나베, 미도리의 삼각구도로 진행된다. 나오코는 결국 상실의 아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와타나베는 또다시 상실의 경험하고 미도리를 찾아가면서 아래와 같은 대사를 독백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러나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그저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이 독백은 불안하고 방황하는 혼란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청춘들의 모습을 와타나베에 빗대어 보여주는 것 같다. 와타나베는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지만, 실은 심지가 단단한 사람이다. 상실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무너져 내리기보다 스스로를 다잡으며 겸허히 받아들이려 애쓴다. 이런 면에서 주인공에게 경외심마저 든다. 어느 누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두 번 겪고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닌 삶 속에 잠겨 있다.’라는 구절이 소설 전체를 아우른다. 이는 죽음이 삶의 대척점인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삶과 공존하고 함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작가 하루키가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지 않을까 싶다. 죽음은 항상 우리의 삶 가까이 존재하기에 현재와 지금 함께하고 있는 인연을 소중히 하고 아끼라는 의미인 것이다. 나아가 과거는 과거대로 흘려보내고, 어려움은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며 현재의 삶을 살아가라고 말해준다.
소설이 삶과 죽음에 대해 다루는 만큼,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띠어 읽는 동안 다소 피로감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작가의 간결하고 세련된 문체는 가독성과 몰입감을 더해준다. 특히, 일상 속의 고독과 허무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방황하고 있는 20대 청년이라면 크게 공감할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상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 어른이 되어가는 청춘들에게 『노르웨이의 숲』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