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감은 편협함을 낳는다. 쉽게 말하면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이야기다. 한쪽으로 쏠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도 인간이란 태초에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형이상학적인 것일수록 더 그러하다. 정치와 종교 같은 것들 말이다. 차라리 감각적이라면 직접 수긍하면 되지만 느끼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선 맹목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제 3자가 중요하다.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종교적 측면에서 나는 제 3자다. 뭐 마땅히 속한 종교도 없고, 딱히 믿는 신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근데 “숭고함”이라는 감정에서 야기된 나도, 타인도 이해 못하는 이유에서 나는 종교를 찾고 있다. 그래서 관련된 몇 권의 책들을 읽어보았다. 아직도 여전히 답은 없었다. 대부분 제 3자가 아니었기에 팔은 안으로 굽었고 그러면 내가 원하는 방향에서 틀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예 제 3자가 아닌 사람들의 지식은 내 호기심과 아예 방향이 달랐다. 그러다 아버지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 도올 김용옥의 “기독교 성서의 이해”였다.
도올 김용옥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근데 제대로 아는 사람들 또한 거의 없다. 나도 그랬다. 나에겐 그냥 강연하는 사람, 뭔가 많이 아는 거 같은 사람, 맨날 도사 같은 옷을 입고 소리만 치고 있는 사람 정도였다. 이 책을 보면서 그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그는 인문학자, 철학자 그리고 신학자이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 내가 이야기하는 제 3자에 가까운 인물이다.
이 책은 재해석의 연속이다. 극동지역 종교의 생성, 그 안에서 기독교의 발현 및 성장 과정, 나아가 기독교가 역사성을 얻은 과정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 역사성을 중심으로 성서의 수정과 편집이 어떻게 되었는지 도올의 견해를 통해 재해석한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당연시 여기는 것들을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흐름을 토대로 대립시킨다. 그렇기에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수긍하지 못 하고, 불쾌감을 어김없이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정제된 확고하고 맹목적인 믿음 이면의 걸러진 진실을 깨닫고 그 늪에서 벗어나기를 도올은 바라고 있었다.
도올, 그는 ‘신’을 본다. 여느 신학자들처럼 ‘신학’을 보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기독교의 교리와 체제 정립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란 말이 아니고 그 안에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신’ 자체를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기나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소수자와 이단자에 대한 종교적 린치는 기독교적으론 부합했을지 몰라도 ‘신’이 원한 세상은 아닌 것이다.
정설을 이야기한 뒤에 항상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신학자로서가 아니라 인문학자, 철학자로서의 지식을 이용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는 재해석이지만 신해석은 아니라고 하며, 그가 제시하는 사실들은 이미 많은 신학자들에게 알려져 있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한국의 신도들에겐 닿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기득권의 팔 안쪽으로 굽게 하는 특정 세력들을 비판하고 비난한다.
적다보니 도올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인 거 같은데, 책이 전해준 지식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못 해서 그걸 원하고 이 글을 읽은 이들에겐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내가 궁금한 것에 대해 답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것을 위한 접근법에 대해 조금이나마 안 것 같다. 좋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