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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것, 그리고 떠난다는 것.
도서명
저자/역자
제시카 브루더
출판사명
엘리
출판년도
2021-03-26
독서시작일
2024년 09월 05일
독서종료일
2024년 09월 05일
서평작성자
이*민

서평내용

집이 없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자면 그들은 항상 연민과 동정의 대상이다. 집이 없다는 것은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이고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은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집이 있는 자들은 자신의 생각과는 모순되게 항상 떠남을 꿈꾼다. 간단한 산책에서 조금은 긴 여행까지 생각하는 이가 있는 반면에 심하게는 일탈을 욕망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는 정착을 꿈꾸는가? 아니면 유랑을 꿈꾸는가?

황금사자상을 받아 화제가 된 영화<노마드랜드>의 원작소설명은 <노마드랜드: 21세기 미국에서 살아남기>이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시작된 전세계적인 경제 침체는 수많은 중산층을 파괴했다. 경제 강국인 미국에서 시작되었기에 그들은 더 큰 피해를 직격으로 맞았다고 볼 수 있다. 제목에 포함되어 있는 ‘노마드’는 유목민, 유랑자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집을 잃고 방랑하며 차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고 이들은 생존 혹은 편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도시라는 정주민의 공간에서 탈주한 사람들이다.

사실 ‘노마드’라는 단어를 이야기하면서 들뢰즈를 빼놓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들뢰즈에 의해 이 단어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노마디즘이란 “특정한 방식이나 삶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이다. 노마디즘의 등장은 신자본주의가 팽배해지고 그 대안인 사회주의가 실패하여 방향을 잃어버린 철학의 고민에 새로운 답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철학이 아니다. 철학은 세상의 일부이기에 자연스럽게 철학은 세상이 된다. 그래서 이 철학적 용어는 사회, 문화, 심리를 해석하는 도구가 되었다. ‘노마드족’이라는 단어처럼 특정한 방식이나 삶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일상에서 벗어나는 사유의 스타일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노마드, 노마디즘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얾매이지 않음’, 그리고 ‘탈주’이다.

우리는 누구나 기존의 가치인 정착을 꿈꾸며 정주민이 된다. 정해진 틀 속에서 살면 걱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 상태’ 속에서 매번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 일정한 권리를 국가에 양도했다. 이것의 연장선을 끝을 보면 증명, 자격, 신분, 정규직 등과 같은 제도들이 있다. 특히 한국에선 수많은 청춘들이 정규직만을 수십 년의 삶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며 그것에 자신의 젊음을 바치고 있다. 그리고 이루지 못하면 실패자가 된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과 한국 청춘들의 차이는 ‘나이’이다. 책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인 노년들이다. 평생의 권리를 이양했지만 제대로 된 노년을 살지 못한다. 그들에겐 사람들의 호의와 제안이 약간은 불편하다. 동정의 대상인 그들에게 필요한 건 사실 정착할 집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지겨운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들뢰즈는 그의 저서에서 삶의 방식을 정주민과 유목민으로 나누었다. 정주민은 하나의 체계 속에서 정착하는 자다. 우리는 이 규칙 속에서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고, 국가에 의무를 다한다. 국가라는 울타리 속에서 보호 받기 때문이다. 이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은 너무나도 두렵기에 우리는 정체성마저도 하나의 체계 안에 구속시킨다.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영토화’라는 개념이다. 영토화는 매끄러운 공간에 홈을 파는 것인데 유목민들은 이 공간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반면 정주민은 매끄러운 공간에 파인 ‘길’이라는 홈을 통해서만 이동한다. 길이 아닌 곳은 누구에게나 험난하고 금지된 공간이다.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유목민은 영토화의 공간에서 탈주하며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 말이 좋지 사실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책에서도 방랑자들은 집을 나와 차에서 생활하며 타이어 펑크, 추위, 좁은 잠자리, 용변 처리, 차량 고장 등 정주민들은 생각하지도 않을 걱정들을 몸으로 부딪혀야 했다. 삶의 주인이란 이런 것이다. 내가 택한 길을 지나가며 겪는 고통은 견뎌야 한다.

길이 아닌 곳을 가다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정말로 반갑다. 하지만 이때의 만남은 선을 동행하는 게 아닌 점에서 잠깐의 만남이라 지속적이지 못하다. 유목민들의 만남도 그러하다. 그들은 돈이 되는 모든 일을 하기에 일정하지 않은 직장에서 만난다. 물건 또한 서로 공유한다. 유목의 삶에선 지속성, 영원성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그들은 자연스럽게 만남, 관계, 자아에 집착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변화하기 때문이다. 유목민들은 새로운 울타리가 만들어져 영토화가 되기 전에 또 다시 탈주를 꿈꾼다.

다시 첫 문단의 질문으로 돌아가겠다. 우리는 정착을 꿈꾸는가? 유랑을 꿈꾸는가? 책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상처입은 자들은 길 위에서 내면의 아픔을 치유한다. 여행과 떠남이 치료제가 되는 것이다. 들뢰즈의 저서 <천개의 고원>에는 이런 말이 있다.

“모든 여행은 강렬하기에, 여행은 자신이 진화하는 장소이자 자신이 건너가는 장소인 강렬함의 문턱에서 치러지기에, 사람들은 강렬함을 통해서 여행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모든 것을 던지고 떠나고 싶어한다. 사실 모든 스트레스는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관계 속에서 나오지 않는 스트레스를 생각해보아라. 쉽지 않을 것이다.

여행, 떠남, 탈주, 일탈 같은 것들이 치유를 주는 이유는 관계들 사이에 껴있는 우리가 그것을 넘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이야 말로 서로 다른 성별, 세대, 직책, 국가, 재산 등의 차이를 넘어 서로의 삶과 고통에 공감하고 환대시켜주는 각자의 개척된 길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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