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는 적절한 옷과 신발이 있으면 언제나 할 수 있는 간편한 운동이다. 그리고 딱히 특별한 학습이 필요한 운동도 아니다. 그래서 다이어트를 목표로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접근하기도 한다. 나도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것은 지극히 보편적이다.
처음에 30분 가까이 걸렸던 5km는 어느덧 20분 54초로 뛸 수 있게 되었고 엄두도 내지 못헀던 10km는 44분 4초가 걸린다. 심지어 살짝 무리해서 뛰어본 하프마라톤도 1시간 47분으로 마무리했다. 이것은 나름의 자랑이다. 내가 달리기를 제대로 시작한지 약 8개월만에 일어난 일이고 이정도면 어디가서 명함을 내밀 정도는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걸보면 꾸준함이란게 참 중요한 것 같다. 이런 꾸준함과 더불어 현재 스스로의 정체성이 ‘러너’라는 말로 형성되고있는 중이다.
다들 한번쯤은 들어봤을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스스로를 ‘러너’라고 칭한다. 풀코스 마라톤을 30번 넘게 완주했기에 ‘러너’보단 ‘마라토너’에 더 가깝긴 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러너든 마라토너든 나보다 그 명칭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러한 하루키의 달리기를 축으로 쓰인 인생과 문학의 회고록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하루키는 그의 문학관과 인생을 달리기에 빗대어 표현했다. “훈련에 의해 길러진 자질들을 재능의 대용품으로 사용한다.” 많은 표현 중 가장 맘에 드는 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질로 견뎌 나가는 사이에 우리는 숨겨져 있던 진짜 재능을 발견하기도 한다. 상상을 해보자. 폭포 같은 땀을 흘리며 발밑의 구멍을 파서 깊숙한 곳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이들에게 우리는 ‘행운’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행운’의 근원을 생각해보면 그만한 근력을 훈련해왔다는 사실일 것이다. 하루키는 스스로를 범인이라 생각하기에 달리기를 통해 소설을 쓰기 위한 심리적, 육체적 근력운동을 했다고 한다.
나도 달리기를 통해 미래를 위한 근력 운동을 하고 있다. 장거리 달리기는 고통을 짓누르고 참는 과정이기에 그 존재 자체가 부조리하다. 달리기를 하기 위해 문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고통은 예견되어있고 그걸 견디러 가는 과정이다. 시지프스가 끊없는 형벌에 대한 의식을 없애고 그 반복 자체를 즐기는 것이 저항이라고 카뮈가 말했듯이, 나도 어떠한 것에 저항하기 위해 달린다는 그 의식 자체보단 발자국과 숨소리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 단순한 과정을 즐긴다. 이것은 반복 속의 명상이다. 반복되는 것만 집중하는 그 시간만은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다. 지금 당장의 걱정과 불안함은 별로 없지만 미래의 내가 그 걱정과 불안함을 다루기 위한 하나의 방법을 지금 훈련하는 것이다.
“인생은 마라톤과 같다.” 라는 말이 있다. 42.195km를 쉬지 않고 인고하면서 결승선으로 향하는 마라톤처럼 인생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역경들을 참고 넘으며 끝까지 포기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루키는 이러한 마라톤에서 한번도 걸은 적이 없다고 자부심 넘치게 말한다. 자신은 달리기 위해 참가한 것이지 걷기 위해 참가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가 남기고 싶다는 묘비명처럼 우리는 삶을 살아야한다. “적어도 걷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