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는 신문에 기고되었던 칼럼을 포함해 짧은 글들을 모은 산문집이다. 총 세 부로 나뉘며 1부와 3부는 한겨레와 국민일보에 실린 칼럼이 담겨있다. 쉬어가는 듯한 2부에서는 사진과 함께 글을 엮어 독자의 지루함을 덜어준다. 2013년에 발간되어 최근의 글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십 년 동안 꾸준히 발행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다이아몬드의 광채가 몇백년이 지나도 시들지 않는 것과 같다.
저자는 1945년생으로 웬만한 대학생에게는 할아버지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장 선생님의 지루한 훈화 말씀이나, 자칭 인생 선배라며 설교를 늘어놓는 꼰대의 말을 듣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을 언급하면서도, 저자는 끊임없이 과거를 현재에 대입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은퇴한 김연아 선수의 2010 밴쿠버 동계 올림픽이나 일제 강점기, 그리스·로마 신화 속 사건까지 그가 말하는 옛날은 다양하다. 하지만 옛날에서 비롯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통찰은 시대를 꿰뚫고 독자에게 닿는다. 그 통찰은 뜨거운 물처럼 독자의 마음을 깊이 우려내고 깨달음을 준다.
아무리 의미 있는 글이더라도 쉴 새 없이 접하면 피곤하다. 타인의 사유를 집중해 읽는 것은 글의 가치를 알더라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행히 ‘밤이 선생이다’는 많은 집중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산문들은 길어도 네 페이지를 넘지 않고, 이는 독자에게 빠른 속도감을 부여한다. 긴 글에 익숙하지 않을 요즘 세대에게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읽기 쉽다고 그 울림이 덜하지는 않다. 밀도 있는 글자들은 짤막한 글의 형태를 띠지만 독자에게 해변의 파도처럼 빠르게 다가와 천천히 빠져나간다.
“나는 내가 품고 있던 때로는 막연하고 때로는 구체적인 생각들을 더듬어내어,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으로 그것을 가능하다면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다.” 글을 읽고 있노라면 문장마다 담긴 저자의 깊은 고민과 사유가 느껴진다. 오랜 시간 다듬고 정돈했을 생각은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우리가 사는 사회,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성찰해 보게 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홀대 된 인문학이 왜 다시 주목받는지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다.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갈 때면 괜스레 풍부해지는 감수성에 감성적인 말들이 튀어나오는 것을 흔히 새벽 감성이라고들 한다. 이를 오글거린다며 피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고요하고 평온한 어둠은 홀로 사유하기에 적합하다. 저자 또한 어둠에게서 긍정을 본 듯하다. ‘밤이 선생이다’는 책의 제목은 불어불문학과를 나온 저자가 프랑스의 속담 La nuit porte conseil.를 자유 번역한 말이다. 직역하면 ‘밤이 좋은 생각을 가져오지’라는 말로, 어떤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한밤 자고 나면 해결책이 떠오를 것’이라는 위로의 인사다. 이처럼, 황현산의 산문집은 내일을 준비하는 밤과 같다. 가만히 누워 생각할 시간을 주면서 내일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갈피를 잡게 도와준다.
<영어 강의와 언어 통제>에서 저자는 영어로 이루어지는 강의가 옆길로 새 나가기 어려우므로 삶과 공부를 연결해 주는 온갖 길들을 차단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한국어로 된 강의다. 다시 말해 무수히 다른 개인의 삶을 인간이라는 큰 틀로 통합하여 감동을 주고, 그 감동을 고유한 자기 삶에 적용하여 공부와 연결하도록 한다. 수십년간 강단에 선 저자의 힘 있는 가르침 앞에 독자는 학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책을 대학생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소위 말하는 MZ세대에게 한 번쯤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분명 ‘밤이 선생이다’는 고리타분함은 피한 채 나보다 먼저, 그리고 오래 살아온 ‘인생 선배’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은 청춘의 한가운데에서 저마다 다양한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자신의 고민이 기성세대와 다르다 생각하지만, 사실은 세대를 막론하고 그 본질이 같음을 책은 말한다.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책임감과 존재의 부담을 느낀다면 이미 누군가 지나간 길을 밟는 것이 때로는 도움이 될 수 있다.
홀로 생각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이 책을 길잡이 삼아 따라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