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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난 이의 밤은 어떠한가
저자/역자
황현산
출판사명
난다
출판년도
2016-05-11
독서시작일
2024년 06월 28일
독서종료일
2024년 06월 30일
서평작성자
서*윤

서평내용

제목: 먼저 난 이의 밤은 어떠한가

 

선생(先生)’이라는 단어는 먼저 ‘선’ 자에 날 ‘생’ 자를 써서 선생이다. 직관적으로 해석하자면 먼저 나서 삶을 살아온 자라는 뜻이다. <밤은 선생이다>를 읽다 보면 먼저 세상에 난 자가 나보다 미리 겪은 일과 먼저 해온 고찰을 들려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밤은 선생이다>라는 책은 황현산 작가의 산문집으로, 총 3부로 나뉘어 있으며 각 부는 짧은 산문들로 구성된다. 1부는 주로 2009년에서 2012년 사이에 작성된 글이, 2부는 사진과 함께 들려주는 이야기가, 3부는 1부보다 이전에 작성된 글로 구성되어 있다. 황현산 작가는 1945년 목포에서 태어나 불어불문학과 교수와 문학평론가로 활동한 이력이 있으며 2018년 8월 8일 별세하였다.

<밤이 선생이다>는 여러 편의 글이 엮인 책인 만큼 다양한 이야기와 주제 의식을 반영한다. 책의 초판 발행은 2013년 6월 25일로,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에 발간된 책이다. 각각의 글은 그보다 더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그 속에서 읽을 수 있는 작가의 사색이 요즘의 내 고민이나 고찰과 닿아있는 부분이 많아 흥미로웠다. 그중 특히나 와닿았던 부분들을 인용하여 나의 고민과 함께 소개하려 한다.

 

맥락의 손실과 압축

사람들은 종종 방식에 치중하여 본질을 잊는다. 압축과 도식화는 이해하기에 간편하지만, 맥락을 잃기 쉽다. 이를테면 대학교의 평점제도나 고등학교의 등급제도가 그렇다. 개인의 학업성취도는 고작 알파벳 한 글자나 숫자 하나로 평가하기 힘든 면이 있다. 이러한 제도들의 목적은 학생들의 성적을 내림차순으로 정렬하여 선별을 쉽게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각자의 노력과 맥락이 묻히고 오직 숫자만이 남는다. 자기소개서와 같이 자신을 설명할 기회도 주어지지만, 자소서 이렇게 써라, 이렇게 쓰지 말아라, 와 같은 공략이 돌아다니는 시점에선 크게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인상 깊었던 글이 있다.

잘못된 코드는 잘못된 그만큼 더 강압적이다. 삶의 진실과 따로 노는 코드는 결코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15쪽, 모자 쓴 사람은 누구인가)”

위 문장은 학습지 업체의 학습 능력 검사에서 아이가 질문자들의 요구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정도의 답변을 했음에도 높이 평가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꼬집으며 쓰인 글이다. 작가는 사회가 요구하는 학습 능력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학교 교육의 코드를 알아채는 ‘눈치’에 있다는 분석을 하였다. 동감한다. 위에 언급하였던 성적의 줄 세우기와도 관련이 있다. 이 사회의 ‘학습 능력’은 다소 1차원적이다. 마치 위와 아래만 존재하고 그 외의 방향은 존재하지 않는 것 취급한다. 우리가 사는 곳은 고차원의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황현산 작가의 글은 현대사회 교육의 가장 아픈 부분을 꼬집었다고 할 수 있다. 질문의 코드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원하는 정답 외에는 전부 오답으로 처리하며 삶의 진실과 따로 노는 질문의 코드는 학습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학습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

맥락을 따진다는 것은 사람과 그 삶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맥락 뒤에는 또 다른 맥락이 있다. 이렇듯 삶의 깊이가 거기 있기에 맥락을 따지는 일은 쉽지 않다. (97쪽, 맥락과 폭력)”

생략과 압축은 편리하지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맥락과 정보의 손실이 발생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수용자 또한 압축된 숫자나 문장 뒤에는 더 큰 맥락이 존재함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나는 현대사회의 많은 문제가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믿는다.

 

밤이 선생이다

책을 읽다 보면 이 책의 제목이 왜 ‘밤이 선생이다’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밤은 선생이다>에는 정답 같은 건 상정하지 않고 그저 이야기와 살아오며 느낀 생각을 들려주는 선생의 형상이 담겨있다. 선생의 생각은 강압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고민하고 성찰하는 건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괴테의 <파우스트> 가운데 한 구절,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라는 그 유명한 구절일 것이다. 여기서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219쪽, 낮에 잃은 것을 밤에 되찾는다)”

이 책은 낮보다는 밤이 어울리는 책이다. 제목에 ‘밤’이 들어가는 것도 이유가 되지만, 위 문장의 내용처럼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며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시간대에 내면의 마음에 귀 기울여 쓴 글들은 읽는 이에게도 비슷한 효과를 준다. 왁자지껄한 사람들 틈에서 읽을 때보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차분히 생각하며 읽을 때 비로소 이 책의 진가가 드러난다.

 

어렵지만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

<밤이 선생이다>의 단점이 하나 있다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책 자체의 단점이라기보다 책과 독자 사이의 지식수준 차이의 문제에 가깝겠다. ‘김지하 선생을 추억한다’에 나오는 ‘영어의 몸’과 같은 처음 접하는 단어도 많이 등장하고,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에 언급되는 ‘2009년 1월 20일 용산 참사’와 같은 근현대사 지식이 필요한 글들이 많아서 책을 읽는 도중에 인터넷을 켜서 단어나 사건들을 검색하며 읽어야 했다. 특히 1980년대에서 2000년 초반대에 쓰인 글이 대다수인 3부의 경우에는 아예 이해하지 못한 글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인터넷이 발달하며 내 생각이 내 것이 아니게 되고, 남의 생각도 어떠한 검증 과정도 거치지 않고 내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요즘에 특히 읽으면 좋을 만한 책이다. 생각을 내면화하고 혼자 생각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만약 이 책을 완전히 독파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글마다 붙어있는 제목을 보고 목차에서 관심이 가는 글들을 먼저 찾아 읽어보는 것도 이 책과 친해지는 방법일 수 있겠다.

 

황현산 선생과의 만남

서평 쓰기에 관한 OT 시간에 강사님이 하신 ‘독서는 작가와의 만남이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책은 교류의 창이며 독서는 그 매개체이다. 책은 기록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마치 작가가 내 옆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밤은 선생이다>를 읽으며 만난 황현산 작가는 사회의 먼저 난 어른으로서 추구해야 할 정의와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의심하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들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었다고 느꼈다. 먼저 나서 많은 이들에게 의미와 깨우침을 준 황현산 선생을 추모하며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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