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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무엇일까
저자/역자
파트리크 쥐스킨트
출판사명
열린책들
출판년도
2006-02-15
독서시작일
2023년 12월 27일
독서종료일
2023년 12월 28일
서평작성자
방*윤

서평내용

2학년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는 지금, 나는 학기 중 수업 ‘소설과 신화적 상상력’에서 조별과제로 내려졌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라는 소설을 읽었었다. 그 이후로 소설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작품을 좀 더 읽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번에 ‘좀머씨 이야기’도 읽게 되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사랑’을 주제로 한 <사랑을 생각하다>라는 책이다. 내가 워낙 사랑이야기, 로맨스를 좋아하다보니 끌렸던 것 같다. 더군다나 굉장히 얇기도 했고 말이다. 이 책은 소설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남들에게 자신을 보이고 싶지 않아했던, 은둔생활을 했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에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신화적 이야기라고 생각이 든다. ‘소설과 신화적 상상력’ 수업에서 오디세우스, 오이디푸스, 제우스, 하데스, 디오니소스 등 여러 신을 다루었다. 그리고 예수와 ‘오르페우스 이야기’등.

일단 여기서는 특정한 인물들이 사건을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닌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먼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은 수수께끼 같은 것이라고 하는데 배변이나 숨 쉬는 것과 같은 일에는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지 않는가 의문을 품는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의사 ‘에릭시마코스는 육체의 진정한 포만감과 배설 행위 역시, 두 인간의 영혼 사이에 오가는 사랑 못지 않게 에로스의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여기서도 ’에로스‘라는 익숙한 단어가 나왔다. 보통 ’에로스‘라고 하면 사랑의 화살을 떠올리게 된다. 디오티마는 ’에로스는 아름다움 속에서의 잉태와 분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죽음을 넘어서까지 지속되기 때문에.

또한 세가지 사례를 다루고 있는데, 첫 번째로는 ’거시기가 팽팽해진 멋진 그대여, 제발 날 좀 안아줘, 난 지금 뜨겁게 달아올랐어‘라고 스티커가 붙어있는 자동차가 있었다는 것이다. 너무 보기가 껄끄럽다고 해야하나, 사람들 지나가면서 다 보는데 유교 사상의 우리나라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너무 숭하게 느껴진다. 왜 붙여 놨을까. 운전을 하다 말고 도로에 차를 세워두고 사랑을 나누는 두 남녀, 이해하지 못하겠다. 아직 나는 어려서 그런지, (나만 그런건지..)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그러한 행위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실내면 모를까 밖에서까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러한 짓을 해야하는가.. 남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격정의 사랑을 나눌 상대가 있다면 나도 그러한 행위를 또한 하게될까 의문이다.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는 서로를 신성함으로 이끈다.‘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파미나와 파파게노가 부르는 사랑의 찬가에 나오는 말이다. 육체적 쾌락과 인간의 ’사회적인 대화‘ 정도를 기대하고 있는 남자 파파게노는 한 무리의 어린 아이들의 도움으로 점점 더 신성한 행복과 불멸의 세계를 알게된다.

이 두가지 사례 모두 완전히 플라톤적인 의미로 아름답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자동차에서의 행위를 한 모습을 보고 도대체 어떻게 에로스는 앞에서 말한 그 한 쌍의 남녀가 아름다움 속에서의 잉태와 분만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할 수가 있을까? 플라톤에 의하면 바보들은 그들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이나 선함, 혹은 성스러운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어떤 지인의 근사한 저녁 만찬에 초대 받게 되었는데, 식사 시간에 이탈리아인 총지배인이 시중을 들 것인가, 아니면 프란츨이 시중을 들것인가에 의문이 들었다. 그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고, 그는 ’사랑스러운 그 청년‘을 플라톤적인 의미로 자신을 ’흥분시키는 아이’, 혹은 ’유혹하는 아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부심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끼며 그 청년에의 ’강력한 사로잡힘과 벗어남‘에 대해 기록했다. 신경이 예민해지자 약을 먹고, 아도르노의 글도 읽어 보았으나, 자신을 흥분시키는 ’그 청년을 얻지 못하는 데서 오는 슬픔, 고통, 사랑, 신경 쇠약, 끝없이 이어지는 악몽 등‘ 때문에 쉽게 차분해지지 않았다. 이를 도움을 주고자 주소를 남겨두었고 편지를 받았다. 아무런 목적도 예감도 없이 편지를 보낸 그 청년을 작가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다. 작가는 자신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었던, 빚을 지고 있는 그들 모두에게 각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작품 속에서, 혹은 작품을 통해 하나씩 기념물을 바쳤다. 어쨌든 그 청년은 장가에게 가장 마지막으로 성적 자극을 주는 사람으로 남았다. 현실의 삶에서는 결코 시도한 적 없는 키스, 그리고 실제로 하지도 않았던 마지막 키스를.

이 세 가지 사례는 사랑과 연모에 대한 플라톤의 분류를 다양한 방식으로 입증해 보인다. 만찬에 초대된 기이한 한 쌍의 부부는 완전한 착각 속에서 고갈되어 가는 에로스의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 두 가지 사례에 비해 남자 종업원에 대한 노작가의 사랑은 여러 가지 점에서 에로스의 본질을 충족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두 가지 사례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에 빠지게 되면 어느 정도 누구나 멍청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2,30년 쯤 후에 다시 그 편지를 읽는다면 멍청함, 치기, 우월감 등으로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좀 더 너그러운 시각에서 말한다면 순진무구해서 그런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프랑스어 ’작은 죽음‘이라는 말은 ’오르가슴‘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교양 수업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성교를 하는 것, 작은 죽음과 같다는 것. 아나톨 프랑스는 ’그에게서는 시체 냄새가 난다. 마치 아프로디테 향수처럼‘이라고 쓰고 있다. 클라이스트는 자신의 마지막 편지들에서 분명히 자살을 염두에 두고 삶의 기쁨과 에로틱한 유혹을 기록하고 있다. ’자살‘이라는 대목에서 무언가가 확 와닿았다. 최근, 즉 어제,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영화 ’기생충‘의 주연 ’이선균‘ 배우가 마약 혐의에 시달리고, 바람 의혹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이번 년도 4,5월즈음에는 아스트로 문빈이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자살을 하고, 그 전에도 여러건 배우, 아이돌 등 여러 연예인이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나는 매번 무서워지곤 했다. 하지만 그런 고통속에서도 여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 순간만큼은 하나의 쾌락 같은 느낌을 느꼈을까? 의문이 든다.

다시 돌아와서 그녀는 클라이스트에게 편지를 썼고 클라이스트 역시 그에 대한 보답으로 독일어로 쓴 편지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편지를 써준다. ’최고로 고통스러운 삶‘을 자신에게 준 것에 감사드린다. ’왜냐하면 신이 모든 죽음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행복한 죽음으로 그것을 보상해 준 것이기 때문이다.‘

클라이스트가 사촌 누이에게 같이 죽자고 했으나 거절했고, 그 ’성스러운 여인‘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 점이 그를 ’설명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으로 그 여자를 쪽으로 끌었던‘ 것이다. 그는 ’소중한 연인‘인 사촌 누이에게 신이 그녀를 빨리 불러 가시기를 바란다고 썼다. 누이의 삶이 안타까워 보여서였을까? 자기가 뭔데 남의 삶을 결정하려고 하는 거지.. 쾌락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는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예수와 친교를 맺고 있는 두 자매가 병상에 누워있는 오빠 리자로를 위해 주님이 와 줄 것을 간청한다. 하지만 이 간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내리신 운명이라며, 하나님의 곁으로 가서 행복을 더 누릴 수 있도록 두라고 했다. 예수는 무덤으로 자신을 안내하라고 했고, 돌을 치우라고 했다. 자매는 거절했지만 예수가 화가 났고, 그녀를 비난한다. 시체가 묻혀 있는 구덩이를 향해 커다란 목소리로 말한다. ’리자로야, 나오너라.‘ 리자로는 그렇게 풀려났고,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유대인은 자발적으로 예수의 추종자가 되었다. 예수는 자신의 운명을 예언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오르페우스 역시 결코 편안하게 죽지 못한다. 두 번째로 연인을 상실한 후에 그는 심한 우울증에 빠져 삶의 기쁜인 여인의 사랑을 거부하고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닌다. 베르길리우스는 자신의 작품에서 이것을 ’그는 에우리디케의 상실을 슬퍼하면서 끝없는 찬 서리를 맞으며 고독하게 북극 지방의 눈 덮인 초원을 헤매고 다녔다‘고 묘사해 놓았다. 오르페우스의 죽음은 완성된 죽음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수가 메시아로서 예언되고 탄생하고 일생안 오로지 메시아로서만 살아온 반면 오르페우스는 비탄에 빠진 사람으로서 신화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오르페우스는 독사의 독에 자신의 젊은 아내를 잃었다. 그녀와 함께 행복하게 지상에서 머무를 수 있기를 원햇던 오르페우스, 그랬기에 지하 세계로 향하는 오르페우스의 여정은 결코 자살 기도로 해석할 수 없다. 오르페우스는 기뻐 어쩔 줄 모르다가도 금세 변덕을 부리고, 맹목적인 용기는 없었으나 어느 정도 문명화되어 있고, 빈틈없고 현명하나 완전히 치밀하지는 못하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와 닮았다. 또한 오르페우스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인간이었다. 이 오르페우스 이야기 또한 교양 수업에서 다루었었다. 그때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디론가 여인을 끌고 가는 오르페우스, 그리고 뒤를 절대 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다. 그 여인이 자신의 아내였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때 교수님께서 오르페우스는 결국 뒤돌아보게 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며 토론을 나눴었다. ’여인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궁금해서‘라는 등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었다. 한편으로 불쌍하기도 했다.

이 책은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좀 뭐하다.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 예시로 나오는 에세이 형식이니 말이다. 그래서 줄거리를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깨달음을 얻어가는 방식으로 읽어야 했다. 하지만 사랑이야기를 좋아하는 나여서 그런지 읽을 때 만은 흥미를 가지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신화적 배경 지식이 없다면 읽기 힘들었을 것이다. 왜 계속 교수님께서 신화적 이야기를 하시는지 궁금했는데 유명 소설 작가분들은 다 그것을 기반하에 글을 쓰는 구나 알게 되었다. 그것이 하나로 확정된 느낌도 들어서 그 또한 신기했고 새롭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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