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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진단하다, 그리고 개혁을 그리다.
도서명
저자/역자
박제가
출판사명
돌베개
출판년도
2014-10-27
독서시작일
2023년 12월 22일
독서종료일
2023년 12월 23일
서평작성자
손*민

서평내용

1.  한 실학자, 조선의 개혁을 꿈꾸다

 한 실학자가 꿈꿨던 청사진의 표상 『북학의』. 박제가는 중국을 배우고 차례로 다른 국가를 배운 뒤 실질적인 국력과 문화 수준을 높여 진정한 ‘문명’으로 진입하고자 했다. 이 점에서 청나라를 배우려는 ‘북학’과 국가의 차원을 넘어 풍요로운 민생을 논하는 ‘이용후생’은 혁신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 된다. 경제 부흥이 개인의 윤택한 삶의 지속과 국가의 부국강병으로 이어지고, 최종에 이르러서 모두가 문명과 그 혜택을 누리는 것이다. 현재의 시각에서는 지식인으로서 박제가가 당연히 주장할 바를 논의한 듯이 여겨진다. 하지만, 이런 발상은 당대 도덕 우위의 기조를 넘어 물질적 풍요를 추구한 극히 이단적인 발상이었다. 『북학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당시 사회의 변동과 박제가의 주장을 관련지어 살펴야 한다.

 덧붙여, 이 책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역자의 배려이다. 역자는 그 통찰의 정확성과 극복을 위한 고뇌를 평가하면서 우리 사회가 되새길 가치를 찾았다. 동시에, 머리말에서 현재와 시간적 거리 및 차이를 가지는 당대 사회상을 초보적으로 파악한 후 책의 요지를 파악하라고 요청한다. 이는 현재, 책을 읽는 우리와 책 속 과거를 구분해 현재와 과거가 얼마나 달랐는지, 우리의 생각보다 얼마나 많은 다양성을 지녔는지, 이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해야 할지 시사하는 바가 크기에 독자에게 깊이 있는 사유 방식을 제공한다. 또한, 원본의 분류와 달리 역자가 임의로 읽을 순서와 내용을 배치할 때 각 장에 포함된 배경 설명과 곳곳에 배치된 그림은 독자가 당시 사회상을 세밀하게 그려내는 것을 돕는다.

2. 조선을 살릴 단 하나의 답, ‘북학’

 글의 논리 구조상 먼저 검토할 사안은 개혁의 방향이 왜 ‘북학’일 수밖에 없었는지다. 우선, 박제가는 「자서」를 통해 이용과 후생을 언급하며, 간결한 문체로 견해의 타당함과 근본적 개혁의 필요성을 힘있게 개진해 나간다. 이 글에서는 조선의 부강,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려는 목적을 밝히면서 낙후성 극복과 의식 변화를 위해 북학을 주장했다.

 「병오년 정월에 올린 소회」에서는 작은 것에서부터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한 박제가가 당면 과제를 빈곤으로 설정했고, 산업 및 경제 부흥을 위한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중국과의 통상, 외국의 기술 도입, 각종 제도와 풍속 개혁을 강조했다. 여기서, 그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실리적인 입장에서 구체적인 방안을 제안한 점을 눈여겨볼 수 있었다. 박제가는 통상과 개방의 단순한 주창에 그치지 않고 교역 시장 형성에 있어 상당히 실천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이외에도 사대부를 상인 명단에 올리는 문제, 의복과 화음, 기술과 상업의 문제, 농업의 황폐화 등 평소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세세한 문제를 언급했다.

 이어, 「『북학의』를 임금님께 올리며」는 북학이 농업 진흥, 사회 개혁의 근간임을 역설하며 개혁을 추진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반영했다. 박제가는 농법 개량보다도 유생 도태와 수레 유통의 우선적인 실천을 말하며 그 근간을 선진 문물 수입에서 찾는다. 그리고 백성의 해진 솜옷, 움막 같은 집 등 자신이 맡은 고을의 실정을 말하면서 농업에 끼치는 해를 제거해 달라 요구했다.

 이를 통해 북학을 내세운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박제가는 낙후성과 뒤처진 의식 타파를 위한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려 했고, 중국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가 말한 이용과 후생, 국가의 부강을 이룰 잠재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평소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유의하기 어려웠을 고을 백성의 사소한 사정까지 알던 그의 성정상 그 필요성이 더 크게 와닿았을 것이다. 이렇게 박제가는 나라와 고을 백성이 평안함을 영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당대의 중국이 과거의 중국이 아니라는 비난을 무릅쓰고서라도 글을 써 내려갔다. 그는 잘못된 관행과 나라의 검소함이 가진 치명적 문제점을 말하는 통찰력, 예상되는 반론과 이에 대한 해결책 제시, 자신이 논한 정책의 효과를 예측하는 정책 연구적인 성격도 보여준다. 물론, 이 모두는 다시 하나의 답으로 귀결된다. 바로 ‘북학’이다.

3. ‘북학’의 논리, 이론 체계를 마련하다

 다음으로 살필 부분은 원론적 주장을 담았기에 먼저 수록된 외편 및 세 편의 내편이다. 역자의 정리에 따르면, 북학의 논리는 크게 다섯 주제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 부정적 인식을 넘어 중국의 발달한 문화와 기술을 배움으로써 부국강병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존주론」에서는 백성의 이익, 추후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오랑캐’의 법과 북학을 채택할 뜻을 밝혔다. 그리고 박제가는 「북학변」에서 중국의 우수함이 명백함에도, 그들을 ‘오랑캐’라며 고립을 자처하는 나라 안의 인사들에 탄식한다. 동아시아 질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겪던 당시 상황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소중화 의식을 채택해 나름의 자부심을 지녔다. 즉, 청과의 관계를 정서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조선이 우월하다는 확신을 내세우는 것이 기저에 깔린 사유 체계였다. 박제가는 당대인들의 패배로 인한 위와 같은 의식이 ‘부정적’으로 전이하는 과정과 그 심리 상태를 예리하게 포착해 이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고 도리어 중국을 배우려 시도했다. 많은 사람의 동조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과 견해를 전개하는 일은 항상 어렵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반에 자리 잡은 그 관념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다. 이 점에서, 지적할 바를 적합하게 짚어냈다고 여겨졌다.

 두 번째, 문제가 경제와 통상에 있다는 주장으로, 박제가의 경제 우선주의 지향이 특히 돋보인다. 그는 「재부론」에서 비교·계산하는 방법을 통해 실질적 손익을 보여주면서 이제라도 중국의 법과 기계, 기술을 배워 나라 안에 전파하자고 주장했다. 동시에, 중국과 통상하다가 국력이 강해지고 백성의 생업이 안정되면 다른 나라와도 통상을 맺을 것 등을 제안했다. 당시 재정은 대동법으로 인해 여유가 있던 상황과 달랐다. 세출은 확대하지만, 세입이 고정되어 재정 압박이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박제가의 경제 우선주의는 세태를 명확하게 진단한 결과였다. 또한, 철저히 경제 우선주의의 입장에서 경제의 향상과 통상의 흐름까지 읽어낸 점을 통해서도 그의 실리주의적인 성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세 번째, 불합리한 제도와 풍속의 개혁을 촉구했는데, 이는 박제가의 경제 중심적 제도 개혁과 합리주의 사상 구조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그는 군사 제도에 있어 수레를 사용한 군수물자 조달과 벽돌 제조 등 다양한 문제를 다룬 뒤, 직업군인 제도를 주장했다. 관직 제도에는 농사를 대신할 정도의 녹봉이 있어야 함을, 풍수설과 장지 문제는 풍수를 다룬 서적을 없애고 풍수가의 활동을 금하는 방안을 강조했다. 박제가의 제도 및 풍속 개혁에 대해 전반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으나, 당장 그의 개혁이 실현되어 경제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이상 농사를 대신할 정도의 충분한 녹봉 지급이 가능할지는 의문이 들었다.

 이외에도, 박제가는 과거 제도의 문제를 분석해 개혁할 것을 주장하며 중국어를 비롯한 외국어 교육의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하기도 했다. 이처럼, 박제가가 원론적으로 제기한 주장들은 그가 지향한 바를 읽어낼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부강한 나라로의 진입을 위해 사회 전반에 자리 잡은 부패를 없애 국가를 대대적으로 개조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시급성을 띤다고 판단한 사안들을 제시했으므로 그 문체는 직선적이고 도전적이며, 단호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시의적절한 문제 제기와 더불어, 북학을 통한, 청나라를 모델로 한 해결 방안을 제안한 점에서 그의 일관성이 가지는 설득력은 명백하다. 이 과정에서 당대 중국의 문화, 기술의 우수함과 사회상뿐 아니라 조선 후기 사회의 인식과 재정 상황의 변동 등에도 주목할 수 있었으나, 현실 적용에 무리한 부분도 있었다.

4. ‘북학’의 적용, 일상의 ‘요구’를 담아내다

 이어서 검토할 부분은 내편과 진상본의 내용으로, 북학의 논리를 실제 생활에 적용할 방안을 세밀하게 다루었다. 먼저, 교통 부문에서는 무엇보다 수레의 이용이 강조된다. 박제가는 청나라 수레의 설명과 함께, ‘움직이는 집’인 수레를 사용하지 않는 조선의 실상을 드러내면서도 추후 상인의 이익 도모와 사신 행차에서의 품위 유지를 위한 방책으로 수레 이용을 건의했다. 그가 기구 가운데서도 수레 이용을 권장한 점은 그의 지향점인 백성들의 편안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합리성과 효율성을 계산한 그의 면모를 확인했다.

 다음은 건축 부문이다. 성의 내실을 다지는 데에 무관심한 점을 지적하며 벽돌의 사용을 강하게 제안했고, 관청이 넉넉한 값을 치를 것을 주장했다. 또한, 백성들이 반듯함과 정교함에서 멀어져 모든 일이 거칠다며 이런 굳어진 풍속의 타개 방안이 북학임을 명시했다. 박제가의 말대로, 성곽은 보호와 방어의 공간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그의 묘사에 따르면 이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점에서 성의 외관보다 내실의 견고가 필수적이며, 이를 위한 벽돌의 사용은 시급한 사안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상업 측면에서는 조선의 검소함이 쇠퇴로 이어질 것이라 경고했다. 재물 사용의 방법을 모르는 것은 재물을 만들어낼 방법을 모르는 것과 연결되며, 이는 백성의 생활고와 직결된다고 본 박제가는 재물을 우물에 비유해 ‘물을 퍼낼’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와 함께, 나머지 부류를 이어 소통을 주도하는 상인의 역할과 장사의 중요성, 매년 북경으로 빠져나가는 은으로 인한 은 품귀 현상, 주조된 화폐의 문제도 날카롭게 통찰했다. 이는 점차 교역이 증가하는 추세에 맞추어 상업의 발달도 점진적으로 이뤄진 조선 후기의 사회 변화와도 연관이 있다. 당시는 주조된 상평통보가 전국 각지로 확대되는 상황이었으나, 수요 증가로 애당초 계획된 호조와 상평청 발행 전담을 넘어 군영과 지방 관청에서 화폐를 발행하고 있었다. 이 점에서, 발행된 화폐는 중앙 화폐로서의 명백한 자격 미달이었다. 박제가가 이런 흐름 가운데 주조 화폐의 문제를 언급하며 새로운 주조의 중지, 규격화된 동전 주조 틀의 제작이나 중국 동전 수입 등을 건의한 점은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공업 부문에서는 철과 목재, 여성의 차림새 등의 문제도 언급하지만, 중국 자기의 정교함을 기준으로 조선 자기의 거친 정도와 투박함을 논평한 부분이 눈에 띈다. 박제가는 장인이 거칠게 제작한 물건이 백성의 마음을 거칠게 만들었다며, 물건 하나에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런 강조가 지나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 전반의 사소한 부분까지 진단해 물질적, 외적 측면뿐 아니라 정신적, 내적인 측면까지 다룬 점은 박제가가 부국강병 차원의 개혁에만 그치지 않으려 했다는 사실을 미리 시사했다고 생각한다.

 농업 부문에서 박제가는 조선이 중국보다 밭 면적을 적게 사용하는 점, 마음대로 씨를 뿌리는 점과 수확 시 소출량 감소 문제를 다루며 전지를 구획해 곡식을 심는 구전법을 언급했다. 또한, 중국처럼 거름을 사용할 것을 권장했으며, 습기와 동결로부터의 고구마 종자 보호, 하천 준설에서 중국의 방법을 따라 도구로 물이 모이는 입구를 통하게 할 것 등을 제안했다. 이러한 박제가의 주장은 각각이 조선 후기 사회상을 잘 보여준다. 밭농사의 경우, 시비법이 진전되었고 인분 사용이 늘어나며 가축의 퇴비도 이용하는 추세였다. 그런데, 조선은 중국과 달리 마르거나 건조한 거름을 사용했기에 효과가 미미했고 이밖에 위생 측면에서의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박제가는 중국처럼 거름을 사용하라고 주장한 듯하다. 그리고 벼의 품종이 다양화하는 상황에서 다양한 밭작물이 전래·보급될 때의 구황작물 보급이 고구마 종자를 언급한 점과 연관이 있다. 이처럼, 박제가는 조선 사회의 변동과 발을 맞추되, 개선해야 할 점은 직설적으로 지적해 실제적인 실천과 이용후생을 도모했다. 박제가의 견해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이에 대한 한 가지 의문 사항이 있다. 백성의 생활을 면밀하게 파악한 그가 왜 농업 부문에서 조선 후기 지주 소작제의 성행과 소작인 지대 부담에 대한 방안은 언급하지 않았는지다. 완역본까지 살피지 않아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이 점이 의문으로 남았다.

 이런 부분 외에도 박제가는 나라의 큰 정책이라고 본 목축과 더불어 문화 분야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렇듯, 실학자로서의 박제가가 누구보다 치열한 분석과 고민을 거듭해 북학과 이용후생을 위한 체계적이고 전반적인 실천의 길을 열어둔 사실이 뚜렷해졌다. 그렇기에, 몇몇 의문과 회의가 남더라도, 그의 견해가 당시 시대를 비추어 봤을 때 대체로 적합했다는 의견을 큰 무리 없이 수용할 수 있었다. 덧붙여, 지금까지 살펴본 『북학의』는 박제가의 시각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독자에게 역사 속 일상을 영위하는 이들의 삶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그릴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5. 고뇌의 압축, 길을 묻는 『북학의』

 『북학의』는 한 실학자가 사회 개혁과 개방을 고민한 흔적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책 곳곳에서 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강경하다 싶을 정도로 단호하기도, 때로 간절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분명한 사실은 중국을 배우자는 그 고뇌와 주장을 통해 박제가가 바라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학을 통해 나라와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아가 ‘문명’으로 진입하려는 목적의식을 가졌다. 그리고 그 실현을 위해 누구보다 현실을 담아내려 했으며, 마침내 주위의 시선에도 주저 없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역자가 초반에 언급했듯, 박제가의 주장 가운데 현재의 시각에서 이해하기 어렵거나 미완의 과제로 남은 부분이 존재함에도, 이 책의 의의는 여기에서 돋보인다.

 물론, 책을 읽다 보면 알 수 있듯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조선 후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변화의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중국의 문물과 기술을 계속해서 주장했다. 그러나, 박제가가 책의 후반부에 실린 박지원의 논평처럼 모르는 것을 묻고 배우는 방법을 학문으로 여겼다면, 이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중국을 배우자는 관점을 현재의 관점에서 왜곡된 형태로 평가하지 않을 때, 그가 말한 ‘북학’의 진정한 의미를 새길 기회가 주어진다.

 한 실학자의 고뇌가 조선이 나아갈 길을 묻는다. 그가 찾은 답은 ‘북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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