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 아가씨를 보지 않아도 한 번은 들어봤을 유명한 말.
책은 이즈미 히데코와 숙희의 연대보다는 이즈미 히데코와 숙희의 숭고한 사랑으로 더 이루어져 있다. 이 하나만으로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책 \’아가씨\’는 퀴어 혐오자들에게 일침을 날리고, 함께 저항하는 내용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사랑하는데, 그게 뭐?\” 에 가깝다. 많은 퀴어 장르의 책들과는 다르게 독자에게 \’동성애\’에 대해 절대 설명하거나 변명하지 않는다. 이즈미 히데코와 숙희는 그냥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랑.
이즈미 히데코가 나무에서 자살을 시도할 때, 마침내 타마코를 벗어던지고 ‘남숙희’로 히데코를 마주 보는 숙희. 함께 코우즈키의 서재를 망가뜨리는 숙희. 히데코를 대신해 분노하는 숙희. 이즈미 히데코 대신 기꺼이 정신병원에 갇히는 숙희…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을 꼬집는 문장들로 채워진 ‘아가씨’는 마치 퀴어계의 동화처럼 보인다.
박찬욱 감독은 아가씨를 한 문장으로 설명한다. \” 아저씨들에 의해 더럽혀진 \’아가씨\’의 본래 의미를 돌려주겠다. 여자 아이들의 \’NUXE\’ 이전에 박찬욱의 \’아가씨\’가 있었던 것이다. 박찬욱과 여자 아이들은 단어를 단어 자체로 보지 못하고 선정적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비판한다. 여자 아이들의 \’NUXE\’와 박찬욱의 \’아가씨\’로 인해 포털 사이트에서 \’NUXE\’와 \’아가씨\’의 검색 결과에서 선정적인 이미지들과 글들은 모두 밀렸다. 이른바 \’노출 밀어내기\’ 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사랑의 승리담에서 더 나아가 이런 행보를 보이는 책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아가씨\’에서 멈추지 않고, 의미가 더럽혀진 단어들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노력하지 않고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결국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