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현대보다 문명이 발달된 미래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도입부에 인간을 인공적으로 생산해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탄생하는 인간들은 사회적 시스템에 입각하여 계급을 가지고 태어난다. 가령 이러한 계급에 맞게끔 외모와 신체조건도 약물을 투입하거나 혈액량 공급을 다르게 함으로써 변변찮은 모습으로 태어난다. 또한 이 계급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세뇌를 당하며 성장한다. 이러한 세뇌는 자신의 계급에 맞게 노동을 하고 살아가는 것에 불평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계급은 가장 우월한 알파부터 시작하여 베타, 감마, 델타, 마지막으로 가장 낮은 계급인 앱실론으로 구성된다. 앱실론은 가장 낮을 계급으로써 육체적 노동을 해야하는데, 이들은 육체적 노동을 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지 않게끔 세뇌되었고, 생각을 하지 못하게끔 책을 읽는 것도 금지되었다. 하지만 앱실론들은 ‘책을 읽고 생각할 것이 많았다면 불행했을 것” 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높은 알파 계급은 “저렇게 생각도 할 수 없고 노동만 하는 삶을 살았다면 불행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소설속에서는 “소마”라는 알약이 존재한다. 이것은 분노가 생겼을 때 먹으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마약보다도 훨씬 좋은 약이다. 이 알약은 더욱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불평을 가지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매개체이다.
나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불만을 가지고 불평등에 분노하며 현재보다 더 나은 삶.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경제적으로 부유해져서 높은 지위를 취하고 싶은 욕심으로 인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자신을 갉아먹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로 인해 경쟁에만 쫓기게 되어 목적을 잃어버리고 방황을 자주하면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세계는 스트레스 받는 일이 없다. 각자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최근에 매우 많이 나오는 얘기가 있다. ‘경쟁에 쫓기지 않고 사소한 것에 감사하며 만족하는 것.’ , ‘돈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돈이 많든 적든 간에 그 삶에 만족하며 자기실현을 하며 자신만의 행복을 쫓아라.’ 등이다. 소설 속 사회는 이러한 사회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원하는 것. 하지만 인간의 끝없는 욕심 때문에 이상적 가치로만 존재하는 것.
하지만 이렇게 주어진 삶에 만족하는 삶이 과연 좋은 것일까? 다시 말해, 행복이라는 감정이 존재할까? 소설 속 주인공은 높은 계급인 알파들이다. 이들은 낮은 계급의 인간들 위에 군림하고 돈이 많아야 할 수 있는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며, 다수와 성관계를 하며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일상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이 소설에서만큼은 “만족”을 “행복”보다 낮은 가치를 생각해야한다고 본다. 현대사회와 소설 속의 사회 중 어떠한 삶을 살고싶은지는 개개인마다의 생각과 가치에 입각하여 판단하며, 이 판단에 대해서는 존중해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알파 계급들은 현대사회와 동일한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가게 된다. 거기서는 소설 속 사회와는 너무나 다른 형태로 살아가는 인간들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낳고, 부모라는 것이 존재하며, 고통과 인내 또한 존재했다. 거기서 “린다”라는 인물과 그의 아들인 “존”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린다”는 예전에는 소설 속 사회에서 살았지만 야만인 보호구역에 방문했다가 그 곳에 남겨지게 되어 그 속에서 고통받으며 지냈다. 그리고 “존”은 이러한 사회속에서 차별받으며 셰익스피어의 책에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은 본인에게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하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알려주었다. 이 둘은 알파계급과 함께 소설 속 사회로 넘어오게 된다. “존”은 소설의 절정에서 멋진 신세계 시스템을 만든 “총통”과 토론을 하게 된다. “소설 속 사회”와 “불만과 욕심과 분노가 있어도 그 속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이 있는 사회”의 시스템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독자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그럼에도 나는 어떤 사회가 더 좋은 사회라고 확신을 내리지 못했다. 과연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항상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고 불행하고 싶어했다. 그러기 위해 치열한 경쟁에 휘말려왔다. 그로 인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멋진 신세계”는 내가 가장 원했던 이상적인 시스템이다. 하지만 오직 한가지가 빠졌다. “행복”이다. 이것은 상대적인 격차로 인해 발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경쟁에서 승리했을 때,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 하지만 이 행복 한 번을 얻기 위해 너무나 오랜 시간을 아파하고 견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스템을 살아가고 싶은 이유는 뭘까? 이것이 고전읽기 수업에서 배운 “초인”의 길을 걸어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일까? ‘눈물 젖은 빵과 알을 깨고 나올 때의 고통. 즉, 고생을 해보고 싶어하는 인간의 특성일까? 모르겠다.
그리고 야만인 “존”은 멋진 신세계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속에서 홀로 살아간다. 자신을 채찍질하며 고통속에서 자신을 발전시킨다. 하지만 신세계의 기자들이 이것을 몰래 촬영했고, 이 채찍질을 본 신세계 사람들 다수가 “존”을 찾아와서 채찍질을 해보라고 하면서 신기하게 본다. 신세계 사람들은 자신을 고통속에서 발전시켜본 적이 없고, 이것을 통해 한발짝 더 발전하는 성취감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고전을 읽어본 적이 없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신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데만 도움이 되는 책만을 읽었기 때문에 야만인의 행동에 공감할 수 없었다. 고통은 행복인데, 야만인의 고통과 행복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야만인은 삶의 행복을 잃어버리고 그렇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며 자살한다.
이 장면은 소설 전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소설속에서 신세계 사람들은 서로를 공감해주는 장면을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각자 자기 생각만 하며 상대를 존중해주는 장면이 없었다.
그리고 상대를 존중해주는 법이 없으니 다수의 사람과 성관계를 하는 것도 무의미한 것처럼 보였다. 사랑이 없다. 그렇다. 멋진 신세계에는 하나가 더 빠졌다. “행복”과 더불어 “사랑”이다. 내가 그토록 바랐던 세계인데도 이 속에서 살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이 두가지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다. 친구들에 대한 사랑, 부모님에 대한 사랑, 좋아하는 이성에 대한 사랑. 이 사랑이 없다면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만족이 아니다. 만족을 훨씬 뛰어넘는 엄청난 가치다. “존”이 야만인 사회를 좋아했던 것은 오로지 어머니 “린다”의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직 이 하나의 가치만으로 모든 고통이 상쇄될 만큼 엄청난 가치가 아닐까? 인간은 사랑을 주고 받아야한다. 그렇기에 조건 없는 사랑이 “아가페”, “극기복례”를 실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사랑”이 “소마”이다. 짜증나고 시기하고 질투 등과 같은 감정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이를 모두 잊게 해주는 약. 바로 “사랑”이다.
만약 존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고 이해해줬다면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부여하는 책이다. 인간의 행복의 근간을 관통하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