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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봉창과 독립운동의 의미
저자/역자
배경식
출판사명
휴머니스트
출판년도
2015-11-30
독서시작일
2022년 11월 22일
독서종료일
2022년 11월 30일
서평작성자
지*은

서평내용

‘인간 이봉창으로서의 삶’

1931년, 이봉창은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처음 찾아가 책임자를 만나고 싶다 하였다. 이봉창은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으나 일본에 머무르며 생계를 이어왔기 때문에 일본어를 현지인 수준으로 유창하게 구사하여 조선어와 일본어가 섞여 임시 정부의 사람들도 그가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여기서 이봉창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찾아간 이유는 취직 알선 때문이었다. 여기서부터 필자의 생각은 틀렸다. 필자는 이봉창이 오로지 독립운동만을 위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찾아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봉창도 사람이었고, 생계가 더 중요한 시점이었다는 것을 간과했다. 그러나 이봉창이 이 당시 독립에 대한 열망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생계가 유지되어야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후 이봉창은 결국 일본인이 운영하는 철공소에 취직하여 생계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그는 다시 임시 정부를 찾아가 그곳의 책임자였던 김구에게 자신이 영국 전차 회사에 취직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이봉창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고, 영어를 배우는 기간 동안의 경제적 여유 또한 없었다. 하지만 이봉창이 그토록 영국 전차 회사에 취직하고 싶었던 것도, 오사카를 떠나 상하이에 온 것도 모두 그 자신이 ‘조선인’으로 살고자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봉창은 자신이 상하이에서도 조선인으로서 살 수 없다면 차라리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평생을 바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고, 이후 그는 거사의 뜻을 품고 다시 일본으로 향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봉창은 왜 그토록 조선인으로서 살고자 했던 열망이 가득했던 것일까? 바로 유년시절의 이봉창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봉창은 서울 용산에서 당시 건축업으로 큰 돈을 벌었던 이진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문창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부유한 시기를 보냈으나, 도락가였던 이진구의 매독과 사업 실패, 사기 등으로 가운이 기울었다. 때문에 이봉창이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본인 집단 주거지의 일본인 과자 가게 점원으로 취직하며 생계를 잇기 위한 노력을 했다. 이후에도 일본인이 운영하는 약국에 취직하는 등 조선과 일본의 경계가 모호하게 일생을 지내왔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는 매서웠다. 조선인과 일본인을 칼같이 나눠 차별하는 것이 법으로 제정되었고 곧 그것이 일상이 되었다. 승진, 부서 이동, 월급 등 무엇이든지 조선인이면 일본인보다 뒤쳐졌다. 그에 회의감을 느낀 이봉창은 술, 도박, 여자에 매달렸고 결국 일을 그만두고 1년 반 동안의 시간을 거쳐 그는 일본으로 향하게 된다. 일본에 도착한 그는 가스 회사 상용 인부로 취직하여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생활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차별은 지속되었다. 이후 나름 안정된 생활에 만족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와중 이봉창은 교토에서의 천황 즉위식을 기점으로 본인이 조선인으로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천황 즉위식을 보려 여러 사람들이 붐볐으나 일본 경찰들은 그중 조선인만 붙잡고 유치장에 가두어 천황이 환궁할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봉창은 여지껏 자신이 겪어왔던 차별과 수모를 되새기며 자신을 ‘신일본인’이라고 생각해왔던 정체성을 버리고 ‘조선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 조선인으로서 살기 위해 상하이로 향했던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대목을 통해서 이봉창도 결국 한 명의 사람에 불과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이봉창이 자신을 신일본인이라고 생각한 것도,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던 것도, 처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고자 했던 일련의 과정이 결국 ‘생계’와 연결되어 있던 것이다. 이봉창이 살아온 환경과 여러 직장을 살펴보면 당연히 자신을 조선인이 아닌 신일본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고 하는 것이 무색할 만큼 모든 것이 다 일본스러웠다. 용산에서 나고 자랐으나 일본어를 배우고 구사하며 일본인 거주 지역에서 일했고, 일본에서 일하며 생활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선 그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차별은 가혹했다. 이는 결국 이봉창의 정체성을 새로이 깨닫게 하였다. 하지만 생계로 인해 자기 자신을 신일본인이라 생각했던 자가 자신이 조선인임을 깨닫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을 자행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간 이봉창은 ‘독립운동가’이다.

‘독립운동가 이봉창의 독립운동 과정’

독립운동을 하고자 다짐한 이봉창은 임시 정부 사무실을 다시 찾아가 임시 정부 직원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독립운동 한다는 사람들이 왜 천황도 죽이지 못했느냐’며 비웃었고 자신이 천황 행차를 지나가는 것을 보며 자신의 손에 총이나 폭탄만 있었다면 천황을 처치하는 것은 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천황을 죽일 수 있다는 말에 김구는 이봉창을 따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봉창은 김구와 대화하며 이 사람이 자신을 독립운동가로서 이끌어줄 지도자가 아닐까 생각하며 독립운동의 뜻을 되살렸다. 하지만 김구의 말을 듣고 그가 자신을 믿지 못해 임시 정부나 독립운동 단체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이봉창의 진심을 들은 김구는 이윽고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으며 이봉창이 거사를 치러주길 부탁했다. 이후 이봉창은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훙커우 쪽으로 가서 일본인 행세를 하며 조선인 만나는 것을 피해 거사의 계획을 수립했다. 여러 달이 흐른 뒤 김구는 경비와 수류탄을 준비해 이봉창에게 건네주었다. 그들은 여관에서 함께 밤을 보내면서 미진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보완했다. 김구는 이봉창에게 수류탄의 사용법과 위력에 대해서 설명하고, 거사를 치를 장소와 일시에 대해 논의했다. 여러 논의를 거쳐 장소와 일시는 이봉창이 정하는 것으로 결론 짓고, 다음날 김구에게 손목시계와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찍은 자신의 사진을 받은 뒤, 자신이 체포되어 취조를 받게 될 경우의 유의사항을 전달 받았다. 거사의 성공으로 인해 꺼진 독립운동의 불씨를 되살리고자 마음 먹은 이봉창은 훙커우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거사를 위해 이내 일본으로 떠났다.

이 대목은 많은 내용을 함축하고 제외되어 있다. 본 도서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경제적 어려움이나 여러 사건들에 대해서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나 필자는 이봉창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더 자세히 그리고 필자의 생각을 곁들여 설명하고 싶었기 때문에 임시 정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외하였다.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는 건 이봉창의 독립운동에 대한 굳은 의지와 강한 열망이었다. 이봉창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담은 말들이 필자가 본 도서를 읽으며 가장 뇌리에 깊게 새겨진 아주 인상 깊은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서른한 해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 사업에 목숨을 바치고 싶습니다.”, “선생님, 저는 영원한 쾌락을 누리고자 즐거운 마음으로 이 길을 떠납니다. 큰일을 반드시 이룰 것이니 서로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그의 이 말은 자신의 독립운동 의지를 다른 무엇보다 더 선명하고 확실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여진다.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을 ‘쾌락’이라고 명명하고, 이전처럼 육신의 쾌락이 아닌 영원한 쾌락을 위하여 거사를 치루겠다는 그의 다짐은 더할 나위 없이 큰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개인적으로 인간 이봉창으로 시작한 그가 앞서 기술했던 그의 발언들로 하여금 그가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거사를 치르기 위해 일본으로 향했다고 생각한다.

‘거사, 실패, 그리고 진실’

1932년 1월 8일, 운명의 그날. 거사는 급박하게 진행됐다. 이봉창은 육군 시관병식이 열리는 요요기 연병장에서 천황 행렬이 이어지는 하라주쿠 역 앞을 지나갈 때 기회를 보아 수류탄을 던져 천황을 폭살할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약 두 시간 가량의 여유가 있어 근처 식당에서 요기를 하려 들어갔으나 식당 안으로 들어온 사복형사들로 인해 경계심이 들었고, 식당 밖으로 나가자 요요기 연병장 입구의 신궁교 주위에 경비 순사와 사복형사들이 곳곳에 깔려 있는 것을 그는 볼 수 있었다. 때문에 그는 하라주쿠 역에서 거사하는 것을 포기하고 천황 행렬이 요쓰야 역을 지나 하라주쿠 역으로 갈 것으로 생각해 국철을 타고 근처의 요쓰야 역으로 갔다. 그러나 신문팔이 소년이 천황 행렬은 요쓰야 쪽이 아닌 아카사카미쓰케 쪽으로 지나간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아카사카미쓰케 쪽으로 이동해 천황이 오길 식당에서 기다렸으나 타이밍을 놓쳐 행렬을 놓치고 말았다. 이후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서둘러 택시를 타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헌병 조장의 명함을 이용해 천황을 볼 수 있는 사쿠라다 문 쪽으로 다다랐고, 두 번째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고 이봉창 자신이 거사했음을 밝혔다.

이봉창은 엄청난 폭발음을 듣고 거사가 성공했다고 생각했으나, 거사는 실패했다. 이봉창이 김구에게 지속적으로 우려했던 수류탄의 위력이 문제가 되었다. 이봉창이 우려했던 바처럼 수류탄의 위력이 약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수류탄 파편이 튀어 마차 밑바닥과 바퀴 타이어가 파손되고 근위병들이 타고 있던 말이 약간의 상처를 입었을 뿐 다친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진실이 나타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류탄을 던진 직후 이봉창의 모습은 현장에서 자신이 던진 수류탄이 폭발하는 소리를 듣고 가슴에 품었던 태극기를 꺼내 휘두르며 ‘대한 독립 만세’를 삼창했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다르다. 이봉창은 거사가 실패했다는 것을 직감한 뒤 순간 머리가 멍해져 어찌 할 바를 몰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그 사이에 범인으로 다른 사람이 지목되었으나 그 사람이 범인은 이봉창이라고 그를 가리켰고, 그도 자신이 범인이라고 외쳐 곧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순사를 비롯하여 근처에 있던 경시청 수사2과장, 헌병 등 여러 명에게 한꺼번에 이봉창에게 달려들었다. 이봉창은 비겁하게 도망가지 않을 테니 난폭하게 다루지 말라고 하였으나 경찰은 거친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이후 그는 사형 판결을 받은 지 열흘 만인 10월 10일 도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극비리에 사형되었다.

본 도서는 264쪽으로 이루어진 그리 두껍지도, 또 그리 얇지도 않은 분량이다. 이러한 분량으로 어떻게 이봉창이라는 인간의 삶, 그리고 가치관과 정체성, 독립운동의 전개와 결말까지 한 번에 담을 수 있는지 경이로웠다. 매 페이지가 신선하게 느껴지고 독립운동가 이봉창이 아닌 인간 이봉창의 삶을 위주로 엿볼 수 있어서 좋은 도서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이봉창의 거사는 실패인 것이다. 그러나 이 거사는 독립운동 역사에 큰 획을 그었으며, 지쳐있던 여러 독립운동가들에게 뜨거운 불씨를 지피도록 해주었고, 독립운동이 앞으로 더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활동될 수 있도록 하는 동기이자 목적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봉창의 거사가 더 특별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자신을 신일본인이라고 생각해왔던 자가 조선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한 뒤 조선인으로서 살고자 했으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을 영원한 쾌락으로 명명하여 기꺼이 제 한 몸 바쳤다는 점을 그 무엇보다 높게 사기 때문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을 조선인이라 생각하며 독립운동을 이어온 것도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확립하고 그 정체성을 위해 독립운동을 자행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인간 이봉창’을 알고 ‘독립운동가 이봉창’을 동시에 알 수 있게 된 본 도서에 감사하며 이번 기회를 통해 이봉창 의사를 포함한 모든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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