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희곡인 ‘템페스트(5막 1장)’에서 제목을 차용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표제와는 다르게 우울한 미래사회의 모습을 그린 고전 명작이다. 디스토피아는 현대 사회의 위험한 경향을 미래 사회에 확대 투영하여 무의식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위험을 비판하는 방법으로, 작가는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신세계의 인간들이 자신들이 이룩한 과학의 성과 앞에 무릎을 꿇고 노예처럼 전락한 채 모든 인간적 가치와 존엄성을 상실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해 경고한다.
이 작품에는 가공할만한 과학기술이 등장하는데, 첨단 생명공학기술이 대표적이다. 인간은 ‘보카노프스키 과정’이라 불리는 시스템에서 만들어진다. ‘런던중앙인공부화/조건반사 양육소’라 불리는 곳에서 수정란 하나 당 96개의 태아를 만들어낸다. 이들은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병 안에서 대량으로 생산된다. 태내 생식이 아닌 체외수정인 신세계의 배양법 기술은 오늘날 ‘시험관 아기’라는 이름으로 이미 시행되고 있다. 1978년 영국의 에드워즈 박사는 세계 최초로 시험관 아기를 탄생시키는데 성공했고 이에 대한 공로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이에 대한 예시로 최근 화제가 됐던 방송인 사유리의 비혼 체외수정의 경우를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신세계의 배양법은 계획경제에 따라 철저히 인구를 통제하기 위한 전체주의 사회의 도구이지만, 현대 시험관 아기 기술은 불임부부를 위한 축복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점을 가진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신세계 속 배양법의 알파계급 아기와 같은 똑똑하면서 건강한 신체의 아기들이 태어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고, 이를 원하는 사람들 역시도 많아지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적 호기심이나 순수한 탐구심이 과학자의 연구 동기가 되던 시대는 저 멀리 사라지고 있다. 과학과 기술이 인류의 복지나 혜택을 위한다는 말은, 이제는 거대 산업과 결탁한 과학기술 프로젝트의 광고 문구로만 유용할 뿐이다. 몇몇 희귀한 분야를 제외한 과학연구는 더 이상 자연과 세계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 말고는 알 수 없는 원자화되고 세분화된 시점에서의 과학연구는, 그 연구 결과가 쓸모와 효용, 즉 환금가능성으로 입증되어야만 인정받고 지속될 수 있다.
한 사람의 과학자가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생산 활동을 수반하면서 지금과 같은 고도의 과학연구에 몰두할 수는 없다. 대학이나 대학원, 연구소는 국가나 기술 산업자본의 연구자금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연구 자체를 시작하지 못한다. 이들의 지원 없이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거대 규모의 과학기술 연구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과학연구는 더 이상 과학자들의 탐구활동이 아니다. 기술 산업자본 시스템이 구축한 조직망에서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거대한 시스템에 따를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과학연구의 최종 목표는 연구 자금을 지원한 기술 산업자본의 상업적 이윤 창출에 맞춰져야만 한다. 물론 이 상업적 이윤이 궁극적으로는 인류 발전을 위함이라면 다행이겠지만…
과학과 기술은 중립적이다. 다만 아무리 순수한 의도의 연구라도 이해관계자들의 탐욕과 이기심이 얼마든지 끼어들 수 있다. 원자에 대한 연구가 원자폭탄으로 귀결됐듯 지능 향상에 관한 연구가 계급사회의 영속화를 초래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을까? 2015년 영국 연구팀은 실험쥐를 통해 뇌 분비 활동을 약물로 조절해 학습 속도와 기억력 향상의 실험 결과를 얻었다. 이를 인체에 적용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알츠하이머, 정신분열증 등의 질병 치료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정작 가장 큰 시장은 질병 치료가 아니라 학습시장이 되지 않을까?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축복을 잉태할 것인지 저주의 재를 뿌릴 것인지에 대한 섣부른 판단보다는 과학기술 자체에 맹목적으로 빠져들고 있지 않은지를 반성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안락함’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방치한다면, 그리고 과학연구들이 인류 전체가 아닌 특정 소수의 이윤을 위하도록 진행된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저 기괴하고 흉측한 신세계를 향해 제 발로 걸어들어가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