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추상적인 생각들이 하나의 이름으로 굳어질 때의 물성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그 단단함은 나의 삶을 이끌어 가기도 하고, 저 밑으로 끌어내리는 추가 되기도 한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겐 \’Fish\’가 그 이름이다. 지진이 나 다 깨져버린 물고기 샘플들에 하나하나 이름을 꼬맨 그에겐, 어류라는 거대한 추가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불활성 상태에 있던 수많은 어류들을 끌어올려 하나하나 이름을 단 그의 집념이 화자를 이끈 것은 그 추가 만들어 내는 중력때문일지도 모른다. 화자가 희망의 끈을 찾아 그의 자서전에 빨려 들어가듯, 이야기의 흐름은 어류에서 인간 본연을 향해 흘러간다.
이 책은 어류에 이름을 붙이는 것에 신앙 없이도 믿음을 가진, 맹목적이었던 한 분류학자의 삶을 추적하며 희망의 끈을 찾아가는 화자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분류학자가 가진 믿음은 \’우생학\’으로 거듭났다. 그 우생학이 정부가 당신을 \”부적합\”하다고 여기면 당신을 끌어내 당신의 배를 칼로 긋고 아이를 가져갈 권리를 미국에 만들어 냈다.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분류하려 했던 그가 인간이라고 못할 것이 없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혼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똑바로 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써왔던 바로 그 세계관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개미들과 별들과 함께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느낌. 소용돌이치는 혼돈의 내부에서 바라본, 차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시고 가차 없고 뚜렷한 진실. 너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진실을 흘낏 엿본 바로 그 느낌일 것이다.
그 사다리가 데이비드에게 준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의 해독제. 하나의 거점. 중요성이라는 사랑스럽고 따스한 느낌.
광기어린 그의 이름, 분류, 자연의 질서에 대한 집착은 사실 누군가를 구분짓고, 분류하여 자신은 이 곳에서 중요하다는 그 달콤한 꿀을 채집하기 위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달콤함을 넘보는 사람들은 다른 존재로 명명하여 자격을 빼았았다. 나는 사실 저 아득히 아래 누군가에게 밟혀 죽은 개미와 똑같이 중요하지 않단 그 혼란을 보지 않기 위해 어류에 이름을 붙이고, 우생학에 몰두해 쓸모 있는 사람들을 분류해냈다. 그리고 결국 우생학은 나치의 중요 사고방식이 되기 이전에, 미국의 국가 정책으로 수립됐다.
그러나 그의 이념은 무너졌다.
조류는 존재한다.
포유류도 존재한다.
양서류도 존재한다.
그러나 꼭 꼬집어,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 연어, 폐어. 이 중에 나머지 둘과 다른 것은 소가 아니라 연어이다. 소와 폐어는 후두개와 폐가 있지만, 연어는 그렇지 않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생긴 생물들 중 다수가 자기들끼리보다는 포유류와 더 가까운 관계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니까 물고기라는 것은, 땅 위에 사는 모든 생물들을 한 집단에 묶어놓은 것과 다를 것이 없단 것이다. 마치 인간과 생쥐를 똑같이 여기는 것과 같다. \’어류\’란, 물 속 생물들의 미묘한 차이를 모두 덮고, 지능을 깍아내린 경멸적 용어다.
우리는 정말로 모두 중요하지 않은가?
무참히 무너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집착을 읽어 내려가다보면, 반감이 생겨 반대의 의견으로 치달았다가, 나 또한 그의 내밀한 두려움에 봉착한다. 나는 중요하지 않다는 무력감.
그러나 물고기가 없단 사실에 주목해보자. 그것들은 \’어류\’라는 이름이 떼어지며 수많은 가능성이 생겼다. 이름을 떼나가다 보면 우리는 비로소 나의 이름만을 손에 넣는다.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은 셀 수 없는 가능성의 이름들이다. 나는 그 달콤한 이름의 물성을 버리면, 흘러 넘치는 혼돈을 얻게 될 것이다. 그 혼돈은 두렵지만, 모든 것이 혼재해있다는 것에서 모든 게 새롭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책을 읽고 8개월 정도가 지났다. 그 동안 나는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며 참 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고, 그걸 위해 미래를 자주 고민했다. 늘 고민하던 한가지.
\’무얼하고 살아야 할까\’
다들 공무원, 회사원 등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나서는데, 나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일까하는 의문과 그래도 사회의 정상성에서 이탈하면 위태롭진 않을까하는 마음이 늘 공존했다.
그러나 끝내 나는 그 두려움 속에 나만의 사업을 하고 싶단 마음을 숨겨놓았단 걸 지난 일년동안의 선택을 통해 알게 됐다. 원래 교환학생을 갈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온 워킹홀리데이였는데, 환경이 바뀔 때마다 사람들이 추천하는 쪽으로 휩쓸려가다보니 고소득 직업과 안정적인 호주의 삶을 누리기 위해 호주 전문대에 들어가는 건 어떨까싶은 고민이 생겼다. 그리고 그건 여러가지 방면으로 생각해봤을 때, 나의 조건에 잘 맞는 선택지였다. 그래서 진지하게 단계를 만들어가던 중에 의문모를 답답함이 생겼다. \’나 이거 하고싶나,,?\’ 싶은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분명 원래 계획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나의 성향에도 잘 맞는 직업군이며, 먼 미래까지 바라봤을때 살기 좋은 나라란 판단까지 세웠는데도 그런 마음이 드는 게 참 이상했다. 결국 처음부터 생각했다. 모든 조건을 제외하고 그냥 나의 마음부터 들여다봤다.
나는 내 것을 만드는 게 좋다. 더 다양한 나라에 살아보고 싶다. 현재 전공공부가 어떻게 쓰일 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재밌다. 규칙이 정해져 있는 곳에서 일하기보단 내가 규칙을 만들고 싶다.
이렇게 늘어놓은 생각을 모두 맞출 수 있는 삶을 떠올리다보니, 나는 룰모델을 찾을 수 없는 삶을 살겠구나 싶은 마음에 조금 두려웠다.
그런데 즐거웠다.
현재는 다시 계획을 수정하고 비효율적이더라도 하고 싶은 것을 해보는 것으로 마음먹었다.
그런 시점에서 이 책에 대해 서평을 작성하다보니 감회가 새롭다.
내가 해왔던 고민과 지금 느끼는 해방감이 이름의 상실에서 오는 혼돈이었다니.
그 고민들은 정말로 내겐 산사태였으며, 앞으로도 자주 겪을 재난들이구나.
나는 앞으로도 쭉 두렵고 설레는 가능성의 혼돈에서 살지 않을까한다.
혹시나 이 글을 읽을 여러분에게도 어떤 깊은 두려움, 욕망이 있다면 자신에게 붙은 이름을 떼보는 게 어떨까?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혼돈에서 본인은 어떤 선택을 하고 싶은지 고민하다보면 본인만의 답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