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현대 사회는 산업혁명에 힘입어 대량생산 없는 세상을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대량생산이 보편화되었다. 당신은 미래에 또 어떤 것들이 대량생산 될지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2540년을 배경으로 한 『멋진 신세계』에서 그 대상은 바로 인간이다. 물건의 등급을 매기듯이 태아들은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5개의 계급으로 나뉘고 인공배양되어 출생된다. 각 계급마다 사회에서 맡은 역할이 정해져 있으며 낮은 계급의 인간은 모두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도맡아 한다. 또한 태아들은 각자의 등급에 맞는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하도록 세뇌되어진다. 따라서 아무도 불행하지 않다. 공동체의 효율과 안정을 위해 가족, 자유, 종교와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과 책을 싫어하도록 훈련받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사랑할수록 공장은 바쁘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멋진신세계』의 세계국은 인간의 대량생산을 통해 안정적인 사회를 이룩했다. 세계국의 구성원들은 소마라는 알약 하나로 쉽게 고통을 없애고 안정과 유희를 얻는다. 그래서 소마는 세계국을 지탱하는 기둥과도 같다. 한마디로 『멋진 신세계』는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세상이다. 책에서는 이런 세상을 문명사회라고 칭한다. 반대로 그렇지 않은 세상, 그러니까 한 사람과 사랑하고 가정을 꾸리며 질병과 노화가 있는 세상은 ‘야만인 보호구역’이라고 말한다. 소설의 말미에 야만인 보호구역에 사는 야만인 존과 문명사회의 통제관 무스타파 몬드는 언쟁한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고생하는 권리와 이 투성이가 되는 권리와 내일은 어떻게 될지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아갈 권리와 장티푸스를 앓을 권리와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마침내 야만인이 말했다.
앞서 나온 구절은 존이 무스타파 몬드에게 한 말이다. 세계국에서 살게 된다면 과연 당신은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2010년대 중반 베스트셀러 도서가 있다. 출판된 지 10년이 넘은 이 책이 최근 대중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아프면 환자지 왜 청춘이냐?’는 반응과 함께 고생 한 번 해보지 않은 저자가 이런 책을 쓰니 설득력이 없다는 비난이 주를 이루었다. 이 책에 대한 여론은 우리사회에서 불행의 가치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준다. 책이 출판될 당시만 해도 고난과 역경 같은 불행은 청년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불과 몇 년 만에 불행의 가치의 위상은 곤두박질 쳐버렸다. 요즘 청년이라면 불행할 권리를 요구하는 존의 말에 반기를 들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이 없다면 행복도 없다. 행복은 상대적인 가치이기에 불행이 있어야 행복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격언이 받아들여 지지 않는 요즘, 불행할 권리를 요구하는 존의 말은 독자로 하여금 많은 생각이 들게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사람들의 감정을 소마라는 약으로 통제한다. 현대사회의 소마는 무엇일까. 대다수가 SNS와 유튜브라고 말할 것이다. 필자 역시 이에 동감한다. 그러나 이런 미디어들이 대중화되기 전부터 우리 사회의 소마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효율 지상주의’에서 온 ‘경제성’이다. 세계국에서는 개인의 깊은 감정을 체제의 위협으로 보고 소마로 없애버린다. 그리고 쾌락을 얻는다. 현대사회에서는 감정은 경제성장의 앞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기에 철저히 무시당한다. 그리고 효율주의에 취해 가시적인 성과를 얻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성과의 이면에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주목해야한다. 다들 유년 시절에 “뭘 잘했다고 울어!\”, \”됐고 둘다 잘못했으니 빨리 화해해!\”, \”참는 게 이기는 거다\”라는 말들을 한 번씩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문제상황만 빨리 넘기느라 개인의 감정을 묵살시키는 참혹한 현장을 목도해왔다. 뭐든 빨리 처리하는 게 미덕이라고 배운 아이들은 \’빨리빨리의 민족\’으로 자라게 된다. 이 빨리빨리의 민족들은 하다못해 언어의 효율마저 추구한다. 서운함, 황당함, 수치심, 분노 등 모두 다른 감정을 유행어 \’헐 대박\’, \’킹받네\’와 같은 한마디로 대신해버리곤 한다. 이들은 독서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10분짜리 유튜브 영상을 2배속 해서 하이라이트 장면만 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영상에 쓴 짧은 댓글에 좋아요를 누르면서 작품에 대한 사유를 짧게 끝마친다. 다채로운 감정들은 느끼하다며 소위 오글거린다 는 말을 덧붙이면서. 참으로도 경제적이다. 그러나 정신은 점점 빈곤해지고있다. 효율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스스로가 대량생산 속 기성품이 되려 하는 세상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공장에서 맞춤인간으로 태어나 개성없이 살아간다. 2022년의 사람들도 대다수가 개성없이 인간다움을 잃은 채 살고있다. 1932년에 쓰인 책 『멋진 신세계』와 지금 2022년의 세계는 많이 닮아있지 않은가? 고효율이 언젠가는 사회적 병폐를 낳을 것을 저자 올더스 헉슬리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대량생산의 효율성을 극찬할 시기, 올더스 헉슬리는 그것이 미래에 어떤 위협으로 다가올지 이 책으로 경고한다. 여러분에게 진정 『멋진 신세계』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