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쓰기

>>
서평쓰기
>
역사에서의 \'만약\' 은 없지만..
저자/역자
박제가
출판사명
돌베개
출판년도
2014-10-27
독서시작일
2022년 11월 03일
독서종료일
2022년 12월 14일
서평작성자
감*환

서평내용

역사에서의 ‘만약’ 은 없지만..

1500810 감건환

비교의 양면성

우리는 남과 비교당하는 것을 태생적으로 싫어한다. 나만이 느끼는 것일까??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엄친아, 엄친딸 (엄마친구 아들), (엄마친구 딸) 과 같은 단어들이 생겼을까? 당시에 북학의를 접했던 조선학자들 또한 그랬을 것이다. 북학의는 어떠한 주제를 놓고 조선과 중국의 실제상황을 서로 비교하여 서술하였다. 따라서 비교를 당하는 입장인 조선의 지식인들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청나라인 오랑캐에게 복속당하고 기존 전통적 동아시아 유교질서를 부정당하는 성리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북학의를 쓴 박제가 역시 이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속담에 ‘지피지기 백전백승’ ‘知彼知己百戰百勝’ 이라는 말이 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백번 이긴다는 말이다. 여기서 ‘상대’란 청나라를 가리킨다. “우리 조선은 현재 힘이 약하다. 그러므로 상대인 청나라를 면밀히 파악하고 공부해야 우리가 이기는 비로소 상대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박제가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그래서 불쾌함을 감수하고도 이 책을 쓴 것이다. 힘 약한 우리가 거대한 제국인 청나라를 언젠가 이기기 위해서는 청나라의 것을 배척하는 것이 아닌 청나라의 문물을 받들고 배워야한다면서 말이다.

이처럼 비교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때로는 부정적이지만 때로는 우리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 남과 비교를 하면 자기객관화가 이루어지면서 자아성찰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단순히 비교만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비교만 하게 된다면, 비교의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되어 오히려 나 자신에게 독이 될 수 있다. 이는 깊은 우울감과 상실감에 젖어들게 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마치 인스타그램에 빠져있는 현대인들처럼 말이다. 인스타그램에서 남들의 일상과 자신의 일상을 비교하게 되고 결국 우울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박제가의 북학의는 단순히 청과 조선을 비교하는 것이 아닌, 더 나아가 조선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될지 방안을 제시했다. 그런 점에서 박제가의 북학의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렇다면 박제가는 구체적으로 청과 조선의 어떤 점들을 비교했을까?

박제가가 바라본 조선과 청의 문물차이와 비교

먼저 그는 교통분야에서 수레와 배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도로와 교량을 잘 다듬어야된다고 설명한다. 조선의 도로는 청의 도로에 비해서 구불구불하고 잘 다듬어지지 않아서 사고의 위험이 크다고 언급한다. 이에 청의 잘 정비된 도로체계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특히 조선이 청나라에 비하여 수레의 이용이 적다고 언급하였다. 박제가는 수레가 많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했던 도로의 정비가 필수적으로 따르게 된다.

또한 건축분야에서 성, 벽돌, 기와, 뜰, 주택, 창고에 대해서 서술한다. 이 중에서 특히 벽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점이 상당히 인상깊었는데, 성곽을 돌보다는 벽돌로 지어야 더 견고해지고 외세의 침략에 잘 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상업분야에서는 화폐와 소비에 대해서 비교하고 다루었다. 이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과 비슷하다. 특히 소비를 강조했는데, 이것은 매우 획기적인 사고방식이다. 모름지기 소비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기 마련인데, 소비를 통해서 경제활성화가 이루어지는 본질을 박제가는 반세기전부터 이미 깨달았던 것이다. 이 점에서 박제가 또한 정약용과 같이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 아닐까 조심스레 평가해본다. 하지만 이는 기존 조선의 농업중심사회의 섭리에 어긋나는 주장으로 당시에는 많은 이들의 반발을 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이 매우 안타깝다.

한편 박제가는 그 외에도 공업, 농업, 목축, 문화부분에서 청나라와 조선을 비교하며 서술하고 있다. 또한 과거제도에 있어어도 조선의 과거제도와 청의 과거제도를 비교하면서 조선의 과거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박제가는 특히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청의 문물을 받들려면 중국어 뿐만 아니라 각종 외국어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향

이렇게 청의 것을 소개함과 동시에 조선의 것과 비교하여 조선이 청의 신진문물을 따라서 글로벌세대에 뒤처지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마치 개화기때의 급진개화파의 논리와 흡사하면서도 다르다. 개화기때의 급진개화파는 서양의 것을 본받아 개혁을 꾀했다. 하지만 국내외 여러요인들에 의해서 그 의지는 좌절되었다. 박제가를 비롯한 이 시기 실학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북학파의 여러 인물들이 청나라의 문물을 받들고 배워야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중에서는 실제로 수용된 것들이 몇몇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이 폐기되었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선후기 실학자들과 급진개화파는 존재했던 시대도 다르고 결도 달랐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이상향은 같았다. 이들 모두 더 나은 미래, 더 나은 살기좋은 조선을 추구했다. 다만 급진개화파와 박제가가 한 가지 다른 점은 기존 것을 완전히 버리느냐, 아니면 중화를 가져가느냐의 차이였다. 중화라는 개념은 고대 주나라부터 유래되었다. 박제가가 주장한 것은 청에 남아있는 중화문명을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지, 기존의 것을 완전히 버리고 외세문물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명확한 한계점이 돋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했듯이 시대를 앞서 타고난 인물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평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하면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정약용등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이들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셋은 박지원 박제가, 그리고 정약용이다. 이들 셋이 남긴 저서가 현대까지 남아있는 것이 첫째 이유이고 둘째는 저서의 내용이 당시에 매우 획기적이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언젠가 정약용의 저서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를 읽은적이 있다. 특히 ‘흠흠신서’를 읽었을 때 근대 현대의 형법 틀과 유사한 점이 많아서 깜짝 놀랐다. 이번 북학의를 읽었을 때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특히 앞에서 언급했던 소비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은 실학자라기보다는 경제학자의 생각과 유사하다. 박제가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아마 경제학과 교수를 하고 있거나 은행에서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이처럼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던 박제가는 비교적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가 귀양가지않고 정계에서 좀 더 영향력을 발휘했다면 19세기 초에 조선이 암흑기 시대에 접어들 일이 없었지 않았을까. 역사에 ‘만약’ 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박제가와 정약용에 대해서는 한번 쯤 생각해볼 법도 하다.

전체 메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