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쓰기

>>
서평쓰기
>
가짜 행복
저자/역자
올더스 헉슬리
출판사명
소담출판사
출판년도
2015-06-12
독서시작일
2022년 09월 02일
독서종료일
2022년 11월 08일
서평작성자
류*현

서평내용

 불행은 아예 존재하지 않은 뿐 더러, 행복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불행이 없는 세상. 어떻게 보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주 이상적으로 다가온다. 취업과 꿈을 위해 대학에 진학할 필요도 없으며, 애초에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조차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대로 나의 구실을 하면 그만이다. 몸이 아플 일도 없고 다이어트를 하며 외모를 가꿀 필요도 없다. 여러 사람과 사랑을 공유하기 때문에 연인만의 사랑을 바라보며 목맬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삶이 정말 행복한 삶일까? 그런 세계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쾌락은 행복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인가? 이 사회가 비윤리적이라 비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헉슬리는 이 멋진 신세계라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경고를 하고자 하였을까?
1932년 출간된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는 SF 장르 소설로 먼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 안에서 모든 인간은 인공 수정으로 태어나며 세계 인구는 20억 명 정도로 일정하게 그 수가 유지되고 있다.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은 전적으로 국가가 책임지고,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인위적으로 변형된 유전자는 그들의 지능과 그들이 살아가게 될 삶을 결정한다. 사람들은 선천적 지능과 외모에 따라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 계급으로 나뉘는데 각 계급은 각각 정치, 생산 등 사회 유지에 필요한 노동을 맡아 한다.
 이러한 통제와 약간의 자유 속, 멋진 신세계에 등장하는 사회에는 21세기의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태생부터 신체 조건을 조작해 신분을 만들고, 그 신분에 맞추어 직장을 배분하기 때문에 원하는 지위에 오르지 못해 좌절할 일이 없다. 하위계급이라 해서 딱히 학대나 착취를 당하지도 않고 소매와 자원도 공평하게 배급받으므로 아무런 불만이 없다. 만약 갈등 상황이 발생한다 해도 사람들의 격정적 감정 변화를 인식한 시스템이 소매를 공중에 뿌리면 사람들은 행복해한다. 게다가 늙지도, 병에 걸려 아플 일도 없으며 다양한 이들과 성적 욕구를 공유하며 살아간다. 모든 오락 수단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으며 결혼제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성행위와 사교활동은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즉, 그들은 스스로 사유하는 법을 알지 못한 채로 자신의 사는 삶의 방식이 가장 옳고, 행복한 길이라고 굳게 믿는다. 우리가 이런 ‘멋진 신세계’를 조금이라도 꺼림칙하게 느끼고, 분명 조건 없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회인데도 기분이 나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나는 멋진 신세계의 사람들이 느끼는 쾌락을 행복이라 부를 수 있는지를 말하고 싶다.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입안에 사르르 기분 좋게 녹는 젤리나 책을 읽어 새로운 지혜를 얻는 단순한 것들로도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이 행복은 누군가의 통제로부터 얻은 것이 아닌 오로지 나 때문에 얻은 행복이다. ‘멋진 신세계’에 사는 문명인들처럼 그저 소마 한 알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행동이라도 내가 직접 참여하고 내가 사유해서 행복을 얻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내가 주체가 되어 선택한 행동들이 모여 생기는 것이다.

"나는 그냥 나대로 있고 싶습니다.
울적한 나대러 가 좋습니다. 아무리 즐거울지라도 타인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다른 어떤 완전한 것의 일부가 아니라 자신이 독립된 존재가 된 것 같다는 이야깁니다.
사회라는 조직체 속의 한 세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기분 말입니다."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p.110

멋진 신세계의 인용구처럼 자신이 자신의 행복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이 정해준 대로, 그저 질 낮은 쾌락만을 위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지성적인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앞서 말했던 행복의 정의를 떠나서, 그럼 ‘멋진 신세계’처럼 기술적으로 크게 발달하고 문명이 발전하면 행복한 사회가 올 수 있는 걸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의 2018~2020년 평균 국가 행복지수를 살펴보면, 10점 만점에 5.85점을 기록하고 있다. 전체 조사 대상 149개국 중 62위, OECD 37개국에서는 35위에 해당한다. 경제력은 세계 10위에 속하는 우리나라가 정작 국민의 행복지수는 최하위권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 반도체, 전기 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로부터 인정받고 있지만 정작 우리나라 국민에게는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한국일보, 한국리서치의 여론조사에서 ‘한국은 희망이 없는 헬 조선 사회’라는 데 동의한 응답은 36.9%였다. 특히 20대는 61.6%가 동의하였다. 가장 큰 원인은 계층 상승의 문이 닫혀 있는 현실, 그리고 공정한 경쟁의 기초가 되는 법과 제도에 대한 불신이었다. 이러한 암울한 문제에 닥친 나와 같은 세대들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속 꿈만 같은 세상을 꿈을 꿀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태생부터 계급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지금의 우리나라처럼 금수저, 은수저 같은 흔히 계급을 나누는 일도 없고, 계급마다 맡은 일들 또한 정해져 있으니 지금처럼 불공정한 고용비리, 낙하산 같은 관습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햇빛이 뜨면 그림자도 존재하듯이 이 세계에도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세계도 있다. 이곳에서는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임신, 출산, 가족 등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고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할 일을 찾으며 살아간다. 평범해 보이지만 발달한 문명사회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야만인이라고 표현하며 비하하곤 한다. 과연 이처럼 평상시 우리가 인간이기에 누릴 수 있었던 임신, 출산의 권리를 벌이고 과학 기술을 얻는 것이 행복한 삶일까? 멋진 신세계 속 과학 기술을 택하여 인간의 자연스러운 권리조차 포기한 문명사회를 보면 기술적으로 발달했지만 정작 행복지수는 낮은 대한민국의 현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이러한 점들을 살펴보면서, 우리 사회도 멋진 신세계 일부를 닮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앞서 말했듯이, 멋진 신세계에서는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계급만을 중요시하고 개개인의 성향은 무시한 채 태어난 대로, 주어진 대로 살아가게 하는 사회이다. 이런 점이 우리 사회에도 은은하게 녹아있다. 약 2년 전에 방영했던 '스카이캐슬' 이라는 입시경쟁 드라마를 기억하는가? 블랙코미디 요소가 많았던 이 드라마는 사람들에게 공감과 함께 씁쓸함을 자아내기도 하였는데, 나 또한 아이들에게 학업을 강조하는 아버지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오르라" 라는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연기자나 제작진들의 뛰어난 연출과 더불어 현실을 콕 집어내는 듯한 이 대사는 유행어가 되어 곳곳에 쓰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현대사회엔 보이지 않는 피라미드가 존재한다. 날 때부터 기득권층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을 때까지 피라미드의 꼭대기는 구경도 못한 채 아랫부분만을 서성거리는 사람도 대다수 존재한다. 이는 하류나 상류로 나뉘는 단순한 사유재산의 차이를 넘어 불공정한 사회제도와 직렬구조를 이룬다.
 사람은 누구나 안정을 추구한다. 더욱이 갑작스레 휙휙 변하는 사회에서 미래를 한 치 앞도 종잡을 수 없어진 탓에, '안정'은 직업 선택에서 최우선의 가치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유년부터 노년까지 모두가 힘든 현대사회에서 안정된 직장과 노후는 크나큰 장점이므로, 요즈음 한국 사회에선 학벌이나 집안에 상관없이 공무원이나 전문직 종사자가 되려 애쓴다. 적당히 안정된 생활 내에서 적당한 취미를 갖고 적당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상을 꿈꾸는 평범한 국민에게 '기득권층의 세계'는 말 그대로 '그들만의 세계'이다. 복권이나 사업, 주식으로 한탕 크게 터뜨린다 하더라도, 그들만의 견고하게 다져진, 보이지 않는 카르텔을 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알면서도 모른 체하거나 아예 신경을 그쪽으로 쏟지 않는 것만이 나름의 합의점이다.
 그렇게 나름의 노력을 기울인 평범한 우리는 안정된 직장에서 은퇴 직전까지 기득권층들을 위해 일하며 살아간다. 세상이 불공평함을 아는 우리는 이 변하기 힘든 진리이자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어느 정도 만족하며 산다. 이는 멋진 신세계의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최상위 계층인 알파 이중 플러스 계급을 제외한 다른 계급들이 자신보다 하위계급인 사람들과 비교하며 스스로 만족해하는 현상은 우리 사회에도 만연하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동기들과 같이 이 책을 읽고 나서 대화를 나눌 때, 멋진 신세계 속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 한해 과연 몇 명이나 그들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올더스 헉슬리는 그들이 결코 행복하다고 말하진 못할 거 같다. '문명인'들은 진정으로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모든 것이 충족되는 상태와 그들에게 주어지는 단순한 쾌락을 행복으로 여기며, 본인들이 생각하는 행복을 목표로 살아간다. 하지만 행복을 목표로 살아가고 행복에만 맹목적인 삶에서 진정한 '나'는 뒷전이 될 것이다. 진정한 '나'없이는 진정한 행복도 존재할 수 없다. 행복이란 여정이지 여행의 목적지가 아니다. 행복은 본인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 본인이 원하는 것, 얻고자 하는 것을 추구하는 과정과 이를 일궈냄으로써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행복은 완벽히 충족된 상태의 지속보다는 결핍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자, 태어난 직후 날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충족된 삶을 살아간다면 그 삶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원하는 것이 있고,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을 때 즉, '나'가 추구하는 가치를 이뤄나갈 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복지와 체제, 경제, 정치 등의 분야가 개인의 행복 실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처럼 그 누구라도, 심지어 사회나 국가라도 한 개인에게 있어 그들의 행복을 정할 수도, 정할 권리도 없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결국, 개인의 행복은 개인이 찾아 나가야 하는 것이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글쓴이는 행복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무엇을 통해 행복을 느끼는가? 이 글을 통해 다시금 '행복'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또한, 우리 사회도 물질적인 부와, 안정적인 삶, 그리고 기계화된 사회에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나아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체 메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