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을 통해 능력주의의 허점에 대해 경고한다.
능력주의는 이미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이데올로기이자 많은 정치인들이 평등을 염원하며 주창하는 쟁점의 중심이다. ‘기회를 얻고자 한다면 대학에 입학하라.’ 기회의 평등을 마련하고자 앞다투어 제시한 능력주의는 과연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고 평등을 만들어내는가?
능력주의는 마치 우리에게 평등을 가져다 줄 유토피아처럼 그려지지만 그 허상 뒤에는 오점이 있다. 능력주의는 사회를 승리자와 패배자로 가르고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자책과 굴욕을 안겨준다. 그리고 승자로 하여금 패자는 그 자신이 노력하지 않은 결과이므로 업신여겨 마땅하다고 여기게끔 한다. 즉 능력주의는 오히려 불평등과 양극화를 심화하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수단으로 기능한 것이다. 능력주의는 시장 주도적이자 기술 관료적 사고를 통해 세계화에 뒤쳐진 이들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 포퓰리즘적 분노를 과열시키고 트럼프의 당선을 귀결시켰다.
또한 정치적 논의에 있어 능력주의는 당파적 중립을 통해 도덕적 어젠다를 배제하였다. 지금 우리에게는 능력주의에 대한 도덕적 담론이 필요한 때이다. 공동선에 대한 민주적으로 숙고하고, 반성하여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일의 존엄성. 샌델은 또한 일의 존엄에 대하여 언급한다. 직업의 귀천은 없다고 했던가. 하지만 능력주의에 길들여진 사회는 직업에도 능력주의적 방식을 적용한 듯하다. 우리는 공동선을 위하여, 개인의 행복을 위하여 능력주의에 대한 도덕적 담론을 나누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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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한국의 능력주의는 어떠한가. 필자는 한국의 능력주의가 대학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양분된다고 생각한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58%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이는 시민들이 충분한 교육과 시민적 덕성 함양을 통해 대의를 위한 토론에 참여할 수 있다는 긍정적 시각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한 편으로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소수의 집단들이 소외 될 수 있음을 뜻한다. 대학 진학률이 높아짐에 따라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된 것이다.
지성과 학문의 상아탑이어야 할 대학의 본질은 과연 지켜지고 있는가? 한국에서 대학 진학은 마치 취업을 위한 보증표처럼 여겨진다. 능력주의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증명하여 대학에 진학하고 성공의 보증표인 대학을 통해 취업하여 얻는 산물은 바로 부와 명예일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 진학은 취업을 위한 발판처럼 여겨진다. 안정적이며 사회적으로 성공의 지표라 여겨지는 직업을 얻기위해 거쳐여만 하는 관문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의 입시 경쟁은 갈수록 과열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입시 경쟁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 예측하기도 했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묘사된 대학 입시 경쟁은 한국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건동홍숙 국숭세단’. 일명 명문 대학 순위라는 이름으로 매겨지는 수도권 대학의 나열이다. 순위 외의, 특히 비수도권 지방대학은 비하적 표현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한국의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입학해야만 능력주의의 장에서 승자가 되는 것이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이들은 싸움에 낄 수 조차 없다.
우리는 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샌델이 능력주의의 결점에 대하여 역설하면서도 그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독자로 하여금 충분한 숙의를 통해 스스로의 견해를 도출할 수 있도록 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오랫동안 사회에 뿌리를 내린 능력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결코 하나의 정책, 한 번의 담론으로는 바뀔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능력주의의 시작은 고려시대의 과거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능력주의는 한국, 미국, 중국 등 수 많은 나라에서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논쟁을 해야한다. 사회를 분열시키고 양분하는 이데올로기를 바꾸기 위해 민주적 논의를 이끌어야 할 것이다.
가난한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여 서울대에 입학한 사례는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이는 어려움 속에서 노력하여 성공한 이에 대한 찬탄이다. 이러한 사례는 빈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능력만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동시에 능력주의는 실현되고 있다는 증명이기에 주목 받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능력주의 사회를 보여주는 반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난이라는 환경 속에서 명문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공증하는, 아이러니한 찬탄이다. 강남의 부유한 자녀가 사교육 없이 명문대학에 진학한 사례가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을 본 적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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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델은 또한 일의 존엄에 대해 말했다. 일은 경제인 동시에 문화이다. 능력주의에서의 일의 존엄이란 일을 통해 자신이 공동선에 기여했다는 성취를 내포한다. 비대졸자 성인이 갖는 직업은 이른바 능력주의적 성취를 통해 성공한 ‘승자’로부터 폄하 당한다. 그 과정에서 ‘패자’의 사회적 기여도를 폄하하며, 그들이 스스로조차 그들의 직업에 회의적으로 사고하게끔 만들어버린다.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준다. 승자는 그들이 얻은 결과가 환경적 요인과 그들의 배경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성취한 것이라 생각하여 오만해지며, 패자는 그들의 노력과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기에 원망할 대상은 오직 그 자신뿐이다. 이러한 작용은 일의 존엄에서도 부조리를 야기한다.
저자는 “더이상 공동선에 기여하지 못하는 투명인간이 된다는 두려움은, 돈을 벌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더 암울하다.”라고 했다. 일을 통해 자신이 공동선에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은 자기만족감을 충족 시키고 사회를 보다 활성적으로 기능하도록 한다. 하지만 능력주의 사회는 사회적 명성과 부를 상징하는 직업을 추구하도록 하며 일의 존엄을 떨어트렸다. ‘화이트칼라’ 직업, 한국에서의 ‘사’자 직업이 존경 받고 선망의 대상이 된 것도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어떤 경제 역할이 명예와 인정을 받을 가치가 있는지, 무엇이 공동선에 대한 가치있는 기여인지에 대한 공적 토론이 시급한 때이다.
모든 노동이 존엄하다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과연 자신있게 얘기 할 수 있는가?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하여 당연히 ‘예’라는 대답을 할 테지만 과연 사회적, 현실적으로 같은 답을 내놓을 수 있을 지 자신할 수 없다. 최근 서울대학교에서 청소노동자가 사망한 일이 있었다. 사인은 과로사라고 했다. 청소노동자의 노동 환경 개선에 대한 지적과 요구는 이미 수년 전부터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형식적인 절차만 반복할 뿐 근본적인 대안과 정책은 추진되지 않았다. 몇년동안 바뀐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더불어 올해 택배 노동자의 과로사에 대한 기사를 몇 번이나 접했는지 셀 수 조차 없다. 특정 직업의 명예와 인정 받을 가치는 그 직업의 노동 환경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 가치는 수 십년동안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아왔다. 사회적으로 존중 받는 직업에서 노동 환경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는 사례는 본 적이 없지 않은가. 혹자는 그러한 직업은 당연히 능력적 성취를 통해 가지게 되는 것이므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존중 받는 직업이란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
능력주의는 무수한 결점을 야기했다. 그 중에서 일의 존엄은 개선이 가장 시급한 영역이다. 더이상 가혹한 환경으로 인해 고통 받는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우리가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인류의 평균 수명이 증가함에 따라 노년층은 갈수록 늘고 있다. 하지만 사회에는 그들을 수용할 충분한 일자리가 제공되고 있지 않다. 사회는 노년층의 사회적 능력을 인정해주지도 않기 때문에,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직업은 매우 한정적이다. 서울대학교에서 근무하던 청소 노동자는 젊은 시절 신문사 기자로 15년을 근무했으며 해외에서 ngo 활동으로 15년을, 그 후 구립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청년 시절 유능한 능력을 갖추었던 이들이 노년층으로 이르렀을 때도 그 능력을 통해 청년 시절 가졌던 직업을 유지하는 것은 현실에서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직 사회에 기여할 충분한 능력을 지닌 노년층이 설 수 있는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그들에게 회의와 두려움을 유발한다. 능력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과연 정말 공정한가? 우리 사회에 최선이 과연 능력주의인가?
공정하다는 착각. 우리는 그 착각을 내던져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