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에 교양 과목을 수강하며 조지 오웰의 “1984”를 접한 후 여러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의 ‘빅 브라더’는 존재하고 있는가? 또 존재한다면 이를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조지 오웰의 “1984” 속 ‘빅 브라더’는 모든 사람을 감시하는 최상위 꼭대기 층의 존재이다. 그는 어디에나 있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모든 건물의 곳곳에 사람들을 지켜보는 두 눈이 여기저기 붙어있지만 이는 포스터로 존재하며 그의 실체를 확인했다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을 감시하는 사상경찰의 존재, 적에 대한 증오감을 증폭시키기 위한 증오주간 등을 통해 ‘빅 브라더’의 위엄과 존재감 그리고 그에 대한 신격화는 끊임없이 커져간다.
‘빅 브라더’는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고 사람들은 감시받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사상에 위반되는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알아서 검열하고 서로를 지켜본다. 여기서 말하는 ‘잘못’은 이 사회에서 일컫는 불법적인 일을 말한다. 다른 사회에서 ‘정상’으로 여겨지는 일들도 어떠한 사회에서는 ‘불법’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두려운 존재인 ‘빅 브라더’는 ‘팬옵티콘’을 연상하게 한다. ‘팬옵티콘’은 18세기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설계하고 이름을 지은 감옥으로 ‘빅 브라더’와 유사하다. ‘팬옵티콘’은 죄수들을 둘러싼 중앙에 위치한다. 빛의 세기와 방향 조절을 통해 죄수들의 방은 언제나 밝고 반대로 간수들의 모습은 보일 수 없게 ‘펜옵티콘’은 언제나 어둡다. 죄수들은 자신들이 언제나 감시받고 있음을 알기에 스스로를 검열한다. 다시 말해, ‘펜옵티콘’이 사라지고 죄수들만 남아있다 하더라도 죄수들은 이전처럼 감시받고 있다 생각하여 규칙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팬옵티콘’ 역시 ‘빅 브라더’와 같이 어디에도 있지만 어디에도 없을 수 있는 존재가 가능하다.
인간은 점차 규율과 권력에 의해 ‘제조’된다. 그것을 ‘교육’이라고 부를지 ‘검열’이라고 부를지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를지는 이를 받아들이는 사고와 이를 활용하는 능력의 차이에 있다. 오늘날의 ‘빅 브라더’, ‘팬옵티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스마트폰의 편리한 GPS 기능, 데이터베이스 저장능력, 한 번도 카메라에 잡히지 않기가 불가능하다는 CCTV, 편리함의 상징인 전자결제 등은 우리의 ‘빅 브라더’이자 ‘팬옵티콘’이다. 이들을 통해 규율과 규제가 이루어지며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검열한다. 범죄를 막무가내로 저지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분명히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고 기록과 흔적이 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회가 컨트롤되는 순기능도 존재하지만, 우리를 감시하고 추적하는 역기능도 존재한다.
이처럼 지금은 우리가 희망하는 ‘빅 브라더’이자 ‘팬옵티콘’이 완성된 최적의 모습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감시 체제’ 또는 ‘규제 체제’를 없앴다고 가정해보자. 사라진 직후에는 감시와 규제가 사라졌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 한다고 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 이 존재들이 사라진 것을 어떠한 방법을 거쳐서라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허무함, 허망함, 기만에 대한 분노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다시 원점으로 돌고 돌아 제 2의, 제 3의 ‘빅 브라더’, ‘팬옵티콘’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빅 브라더’와 ‘팬옵티콘’을 없애기보다는 더 나은 방향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을 연구해나가는 것이 현재의 최고 목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