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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시체와 같은 시집
저자/역자
출판사명
출판년도
독서시작일
2020년 11월 21일
독서종료일
2020년 11월 21일
서평작성자
이*민

서평내용

박상륭의 소설은 소설이라기 보단 하나의 시집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문장 하나하나에 은유와 은유, 은유의 은유, 은유 속의 은유, 은유 밖의 은유, 은유의 그림자 등이 쏟아져 있는 축제의 현장이다. 본래 이러한 은유는 큰 충격과 울림을 준다. 하지만 박상륭의 은유는 이러한 충격과 울림을 넘어서 내 뇌를 쥐어짜고 쥐어팬다. 나는 이런 이해불가능한 그의 글을 단어 그대로 단지 “읽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대로 기의에서 기표를 벗긴다. 언어란 사회적 합의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나 그는 그런 합의를 거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듯이 책 속에서도 바늘을 찾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할 일이다. “불가지함”과 “불가해함”이 그의 소설을 함축할 수 있는 좋은 단어이다.

일단 이번 독후감은 지난번에 <열명길>을 읽고 적은 독후감의 연장선이다. 지난번에 불교적 관점과 기독교적 관점으로 그의 소설을 이해해봤다면 이번에는 지난번과는 다른 관점으로 적어볼 예정이다.

그의 소설은 기독교적이지만 또 모순적으로 디오니소스적이다. 기독교의 세계관을 이용하면서 기독교의 세계관을 다른 신화와 종교와 엮으면서 철저하게 해체한다. 소설집의 제목이자 그의 첫 번째 소설인 <아겔다마>에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성경의 마태복음을 보면 유다는 예수를 은 30에 팔고 나중에 이를 후회하고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유다가 죽은 그 장소가 바로 아겔다마이다.

일반적으론 참회와 권선징악의 성격을 띠는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하지만 박상륭의 소설에서 그딴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 부모가 없는 주인공을 아들처럼 보살펴준 노파를 갑자기 강간하여 죽이고 자신 또한 죽는 이야기. 전체적 맥락은 비슷하지만 무언가 많이 어긋난 듯 한 느낌만 든다. 기괴하고 괴상하다. 기독교적 도덕법칙에 크게 어긋난다. 비이성적이고 불편하다. 이런 이중적 성격과 갈등을 잘 나타내는 단어는 작품 초두에 나오는 “기도하는 사티로스” 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이러한 이분법적 갈등을 넘어서서 승리감을 느낀다. 이해되지 않는 이러한 태도에 대한 이유는 뒤에 실여있는 다른 소설 <쿠마장>에서 알 수 있다.

지상적인 것이 삶을, 초월적인 것이 삶을 넘어선 것들을 나타낸다면, 그 사이에는 ‘죽음’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죽음’은 지상의 모든 것을 바래지게 만든다. 지상의 것들은 초월적인 것이 되기 위해 ‘죽음’을 통과하고 그 의미가 탈색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아겔다마>의 주인공의 변화 사이엔 노파의 죽음이 있다.

또 그의 소설은 연금술적이다. 비금속이 자신을 녹여 다른 것과 합쳐져야만 귀금속이 될 수 있듯이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만 완전하고 무결한 영혼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질료를 형체로 만들어주는 촉매제를 공(空)이라고 일컫는 것이 해탈이다. ‘죽음’은 완전한 소멸이 아닌 부활이라는 희망을 품고 잠든 질료이다. 완전한 연금의 과정을 지나야만 완전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거듭 죽어야 사는 생명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 회귀, 반복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음과 양의 양극을 갖는 타원.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난해하고 어려운 책을 읽고 적는 독후감을 깔끔하게 마무리 하는 방법은 잘 모르겠다.일단 박상륭의 책들은 살아있는 시체와 같다. 분명 정교하고 빼곡하게 짜인 문장들은 생명을 가지고 있으나 썩은 냄새가 난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나 독자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좋은 감정은 그의 작품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책을 펼치는 순간 알게 될 것이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흡입되는 본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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