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소설이나 웹소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인간 이외의 존재가 유희 등의 이유로 인간의 세상 속에서 제 3자의 입장에서 인간들을 바라보며 그 세계를 서술하는 장면을 종종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이 마치 그러한 존재의 시점과 유사하다고 느꼈다.
요조는 어려서부터 인간에 대한 감정(정, 배고픔, 욕망 등)을 지각할 뿐 이를 제대로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남들에게 튀는 것은 원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그는 익살과 웃음을 이용해 이를 모면했다. 이 순간부터 요조는 자신의 본질은 숨기고 세상을 바라보기 위한 페르소나를 쓰기 시작한다. 그 가면을 쓴 채 남들 사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요조의 생각과 모습에서 나는 ‘인간세계는 허례허식과 같은 것들로 가득 차있다’ 라는 작가의 메시지를 주운 것 같다.
우리는 남들의 앞에선 누군가를 칭송하나 뒤에선 헐뜯곤 한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양면성과 같은 단어로 정의하고 이것은 이 소설에선 요조, 요조의 아버지, 호시키에게 적용 된다. 그러나 책에 나오는 여자들은 순수성에 적용된다. 그들은 어떠한 관계, 이득 등에 얽매이지 않고 요조만을 바라보다 무언가를 하나씩 잃어간다. 인간의 순수함과 양면성이라는 두 단어 자체도 이중성의 측면 내에 들어있고, 주인공 요조의 삶 그러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하고 생각한다.
소설 내에서 요조와 호시키의 비극과 희극 놀이가 가장 많은 기억에 남는다. 증기선, 기차는 희극 명사이고 전철, 버스는 비극명사다. 담배와 주사기는 희극명사이나 약과 의사는 비극명사다. 그리고 삶과 죽음은 모두 비극명사이다. 작중 인물도 문제를 풀 때, 여러 번 틀리고 보는 우리도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 또한 이중성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저 단어들 자체는 비극과 희극 모두를 함의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저 단어들은 바라보는 순간이 되어서야 비극인지 희극인지 결정된다. 오로지 그 사람의 내면에 따라.
그런데.. ‘꽃과 여자는 반의어, 여자와 창자는 유의어, 창자와 우유는 반의어’ 라는 부분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무슨 말일까?
<요약 및 느낀점>
존재 자체가 이중성인 요조는 이중적인 인관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가 결국 교류가 거의 없는 한적한 오두막에서 비극인지 희극인지 모를 모습으로 마무리되며 소설은 끝난다. 이중적인 인간세상에서 인간은 이중성이 없어져야 무너질까? 아니면 그 이중성이 극대화 되어야 무너질까?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어느 정도의 이중성은 필요하다. 공과 사의 경계로써. 많은 극작, 드라마, 영화 등에서 무너지는 인물들을 바라보자. 웃기다. 그러나 실상을 알면 슬프다. 이래서 ‘웃프다’ 라는 말이 나온 것 같다. 이 소설과 우리 세상 전체를 관통하는 말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