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 숲
황인찬 시집<구관조 씻기기>중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사림이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았다
옛날 일이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간절함과 결별하던 순간의 기억은 여러 형태로 오래 남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며 이 무화과 숲이라는 시가 가장 먼저 떠올랐는데요. 여러분은 무화과 숲으로 보내던 많은 것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신가요?
무화과는 꽆이 피지 않는 과실이라고 해서 무화과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 꽃은 과실 내에 피어서 외부로 나타나지 않을 뿐이라고 하는데요. 저는 이 단편 중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중 인물인 명지가 무화과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나는 장미색 비강진, 남편과 같이 만든 우리 집 냄새, 대화하기에는 너무 유리된 인공지능 시리, 눌린 베개 자국.
이 일련의 표현에서 바깥의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하여도 결국 과실 내에서 자신이 피우고 가라앉혀야 하는 삶을 명지는 살아가고 있는 거 같습니다. 마치 과실 안에 갇힌 꽃처럼, 구 안에 갇힌 사람들에 관해서, 바깥은 여름인데 여전히 겨울을 사는 삶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부재로 인한 나지신의 실감_ 구안에 갇힌 사람들의 위로
시리에게 고통에 대해- 인간에 관해 묻던 명지를 저는 '타인을 위해 죽은 남편을 이해해야 하는 아내'로 바라보았습니다. 명지의 분노를 중ㅅ미으로 비추어졌습니다.
나를 남겨두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릴 수 있느냐'라는 분노에, 남편의 행위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으므로 바라보았습니다. 명지는 남편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고 어딘가 살아있다는 듯이 현석에게 행동했죠.
남편을 이해할지 못한 채 그저 끊임없이, 부재로 인한 빈자리에 홀로 남겨져 분노하고, 남겨진 나 자신을 실감 할 뿐입니다. 갑작스레 반쪽이 뜯겨 나간 자리에 서서 홀로 나에게서 나는 소리, 남겨진 냄새, 자국 등만을 더듬고 바라봅니다. '죽은 위에서, 다른 건 몰라도 죽음만은 계속 피어날 수 있다'고 느낄 만큼 죽음, 부재에 가까이합니다.
그런 명지의 시리에게 죽음을 묻는 장면은 더 깊게 생각하는 장면 같습니다. 처음에 저는 죽음 이후의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 어디로 가고 싶으냐는 말은 종교적인 행선지 같았습니다. 죽음 뒤에 원하는 행선지를 종교로서 찾는, 지옥으나 천국 따위를 말입니다. 하지만 이글을 다 읽고 나서 어디로 가고 싶으냐는 대답은 사후세계를 말하는 거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죽은 자를 위한 애도, 위로의 대답, 살아남은 사람을 위한 질문 같습니ㅏㄷ. 그때 시리에게 목적지로 가는 법은 말해줘도 거기까지 함꼐 가주지는 않는 친구로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렇지만 수많은 그저 흘려보내던 시간과 불필요한 동정, 위로 속에서도 결국 외면하려고 했던 것을 마주보게 만든 것은 같은 위치의 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명지는 지용의 누나에게 편지를 받은 후에야 줄곧 외면하려고 했던 어떤 '눈'과 마주한다.라는 표현을 적었습니다. 계곡 물에 잠기며 세상을 향해 손을 내밀었을 지용의 눈을 떠올린 것입니다. 그 순간에 죽음이 아닌 삶을 떠올렸을 남편의 눈, 타인의 삶을 마주 보고 손을 뻗었을 남편에게 어찌 죽음으로 뛰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차가운 물이 아닌 남편의 따뜻한 손을 움켜 잡았을 지용, 그 마주침 이후 명지는 이전과 다른 슬픔을 느꼈을 거 같습니다.
그 이후 저는 명지가 어디로 가게 될 거라고 결론 내릴 수 없습니다. 남편의 부재를 실감하였다고 하여도 잊고 원래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말할 수도, 또 다시 멈춰진 삶과 상실의 연속을 보내고 분노할 거라고 저는 쉽사리 짐작할 수 없스니다. 그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질문만 던질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만큼 타인의 고통에 위로하고 공감함에, 남겨진 이들을 예측하는 쉬운 말과 글을 적을 수 없습니다.
그녀의 '안쪽은 겨울이' 끝이 났다고 이야기 하기에도 바깥은 여름이라는 열기로 가득한 계절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도 무화과라는 이름을 붙이듯 무지의 말로서 느껴질 뿐입니다. 어떤 위로와 공감도 닿지 않는 무지의 말을 뱉을 것만 같은 생각에 이 이후의 명지를 말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상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그 크기와 받아 들이는 강도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그 사실에 우리가 조금 더 현명하고 의연하게 대처했으면 좋겠습니다. 상실에 조금의 눈물을 흘리더라도, 오랫동안 애도하고 위로하여도 우리는 함부로 그 크기에 가늠하고 말할 수 없음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상실한 사람에게 찾을 수 있는 '예의'임을 ,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