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문제를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라며 외면하는 것은 폭력이다. 나의 문제가 사회적 문제이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다시 이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궁극적인 해결을 위해 다함께 힘써야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에도 개인주의 사회가 도래했지만 나 혼자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범죄에 대해서는 너나할 것 없이 분개한다. 가령 2008년, ‘조두순 사건’이 보도 되면서 온 국민의 관심이 쏟아졌고 가해자는 범국민적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위안부 문제의 피해자는 2만 명이 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왜 우리는 이 문제를 서둘러 해결할 수 없었을까?
위안부 문제는 사건 발생 이 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대두되는 사회문제 중의 하나이다. 이 사건이 서둘러 논의 되지 못한 데는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라는 점과 유교중심의 강력한 규범사회인 우리나라의 특성이 한 몫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 할머니들은 전쟁이 계속되어도, 전쟁이 끝나도, 신체적?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가하면 몽유병에도 시달렸고 당신께서 위안부에 갔다 온 것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려운 마음에 제대로 된 병원치료도 받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위안부 피해 신고 기간에도 당당히 신고할 수 없었고 당연히 보상 또한 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피해자들은 선뜻 나서지 못했고 피해 여성들이 강제적으로 입을 닫아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증언을 시작으로 비로소 위안부 현실이 세상밖에 알려지게 되었다.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기 전의 나는 ‘위안부’라는 명칭과 ‘근로 정신대’라는 단어를 구분 없이 사용하였다. 정신대란 ‘나라(일본)를 위해 몸을 바친다.’는 의미였다. 당시 일본군에 처녀공출을 명목으로 위안소로 붙잡혀 간 여성이 있는가 하면 ‘근로정신대’로서 일본의 여러 공장에 연행되어 노동력을 착취당한 이들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안부와 정신대는 완전 다른 의미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명칭에 대한 혼란이 많은데, 이 명칭이 최종결정 되기 전까지 논란의 여지는 계속됐다. 논란 이 후 1992년 8월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이하 정대협) 1차 회의 당시 ‘강제 종군 위안부’로 부르기로 결정하였고 다음해에 열린 2차 회의에서는 ‘일본군 성노예’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결의하고 이때부터 ‘위안부’라는 말로 통일하여 사용하기로 했다.
지금도 명칭에 대한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위안부’라는 명칭 하나만으로 모든 피해자들의 고통을 대변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섣불리 명칭을 변경하기에는 사회적 혼란이 야기될 수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명칭이든 그 뜻을 정확히 알고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된 명칭 사용으로 피해자들을 두 번 상처 주는 일은 없어야하기 때문이다.
해결도 보상도 없는 세월은 45년부터 지금 2016년까지 속절없이 흘러만 갔다. 그 세월 속의 피해 할머니들의 고통은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런 분들이 또 다시 무너지는 일이 일본에서 행해졌다. 1994년 새롭게 들어선 일본 정부가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을 설립해 우리나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께 ‘위로금’을 지급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는 일본의 범죄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보상에 상응하는 조치로써 명백하게 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수단에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억만금을 요구하지도, 청춘을 돌려내라고 억지를 쓰지도 않으셨다. 다만 당신과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길 기도하셨고 진심어린 사과와 따뜻한 말 한 마디를 원하셨다. 사실 이 요구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일본 당국은 범죄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도리어 강제동원에 대한 증거가 없으며 위안소의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그 일을 행하여 억만금을 벌어 나갔다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했다. 위안소에 들어간 순간부터 눈을 감는(감을) 날 까지도 일생이 트라우마와 후유증에 시달리는 이 일을 과연 자발적으로 선택했을까? 시골의 10대의 소녀들이 이역만리 타국으로 가서 하루에 30명이 넘는 군인을 성적으로 상대해서 외화벌이를 했다는 이 일이 상식선에서 가능할까?
이 모든 일들을 알면서도 일본의 주장은 굽혀질 줄 몰랐다. 하지만 증거는 너무도 명백히 살아있다. 위안소로 동원되어 간 피해 여성은 최소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이 중에서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들은 3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그 외의 여성들은 자살하거나 병에 걸려 죽거나 전쟁이 끝날 무렵 방공호에 갇혀 대량 총살 당했다.) 그나마 살아서 돌아와 공식적으로 피해 신고를 접수한 인원은 1990년대 후반에는 2000명 정도 있었다. 이마저도 지금 현재 2016년 4월 15일을 기준으로 생존해 있는 피해자는 국내41분 국외 3분으로 총 44명으로 공시되어 있다. 더 늦기 전에, 진실로 사과를 받으실 분들이 먼 길 떠나버리기 전에, 우리의 움직임을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가 원하는 바는 금전적인 배상이 아닌 진심어린 사죄와 인권에 대한 인정이다. 이 일은 비단 가해일본군인과 피해 할머니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을 분명하게 가져야 한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잔혹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넋과 생존하고도 일생을 힘들게 살았던 분들을 위해 우리는 바쁘게 움직여야한다. 더 이상의 ‘무관심’이라는 폭력은 피해 할머니들께는 너무도 가혹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를 등한시 하는 것은 아니다. 정대협의 수요 집회를 참석하는 인원과 ‘희움‘과 같은 홈페이지를 통한 다양한 의식행사는 지금도 끊임없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위안부 문제를 재고시킬 뿐만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해 바로 알고 정말로 피해 할머니들이 원하는 차원의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했다.
현대에 와서 독일은 유대인 대학살 당시 저지른 잘못에 대해 그 책임을 당당히 지고 공식적인 사죄를 한 바가 있다. 그런 독일을 보며 우리는 일본에게 독일과 같이 우리나라에, 피해 할머니들께 사과하라고 다그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이 다그침에 대한 권리가 있을까? 베트남전 당시 양민을 학살하고 민간인을 성폭행 했던 이력은 우리 군에도 존재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 모르거나, 모른 척 하고 있다. 그렇게 따지자면 베트남의 피해자들 역시 한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해서 권리를 되찾고 사죄 받아야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베트남전 당시에 피해를 입은 여성들에 대한 사과의 말이나 보상은 없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진심어린 사죄를 원하듯 우리나라 또한 월남전 당시 성폭력 피해를 당한 분들을 위해 진심으로 사죄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일제 강점기든 베트남 전쟁이든 그로인한 피해자가 나왔다면 응당 거기에 맞는 사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려서 누군가가 상처 입었다면 사과해야한다는 것은 유치원생도 알고 있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