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수없어요, 님의 침묵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 한용운.
대쪽같은 기개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운동가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을 비롯하여 많은 저술과 강연으로 조선의 불교를 개혁하고자 했던 종교인 한용운
엄연한 잡지사의 사장 언론인 한용운
그를 수식할 수 있는 문장은 꽤나 많을 듯 하나 그를 수식하는 문장은 하나로 수렴된다.
바로 현실참여이다.
일제강점기때 지식인으로서 어떤 행동을 해야할까.
낡아버린 불교를 타파하기 위해선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많은 고민끝에 깨달음을 얻었고 곧 그의 법호가 되었다.
그는 절대 불의에 굽히지 않았다.
같이 독립운동을 하던 만해의 친구가 친일을 하자 그 뒤로 만해가 그 친구를 보지 않았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혹은 3.1 운동을 하며 옥중에 갖혀 재판을 받을 때도 스스로를 변호하며 판사와 검사를 혼쭐내었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위인전에 뻔히 나오는 진부한 표현인 절개, 지조는 현실에서 비교적 찾기 힘들기에 참신한 표현이 되는 것 같다.
나는 그런 만해의 행동에 전적으로 동감하지 않는다.
대쪽같이 행동함으로서 주위 사람들이 피해를 겪는 상황이 많았다.
나는 삶에서 적당의 처세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도 많은 생각이 든다.
현실에 순응하는 것 vs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는데 이상을 향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이 든다.
이 둘은 조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은 대쪽같이, 문학은 유하게.
어쩌면 만해는 강직한 삶을 여리여리한 문학을 통해 조화를 이루고자 한 것이 아닐까?
그냥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의 삶은 우리에게 책으로 깊은 자극거리가 되었다.
21세기의 한국을 사는 우리에게 만해가 어떤 메세지를 던지는지 한번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