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즐겨봤다” 는 저자의 회고로 시작되는 이 책은 불행히도 첫 문장부터 나의 흥미를 자극하지 못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시중에 인문학에 관한 책이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오는데, 세상의 모든 매체 속에 ‘인문학’의 진리가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의 주변 가까운 곳 어디서나 찾을 수 있는데 굳이 좋아하지도 않는 만화에서까지 인문학을 찾아야 하느냐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게다가 저자는 “내가 이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마지막까지 가장 염두에 둔 독자는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기준에 따르자면 나는 아예 이 책을 읽을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만화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도 못했고, 관심을 가질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며칠 간 읽고 있었던 책을 잠시 접어두면서까지 이 책을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내 시간을 이 책을 읽는데 투자했을 때 그에 따른 효용이 나오기는 할지에 대한 의문이 먼저 들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애니메이션과는 별개로 저자의 흥미로운 생각들이 상당히 많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저자의 생각에 동감하기도, 반대하기도 하며 생각보다 빠르게 책을 읽어 내려 갈 수 있었다. 물론 이 책에서 저자가 예로 든 만화들 중 내가 아는 만화는 하나도 없었다. 그 때문에 이해가 힘든 부분들이 많아 책을 읽는 중간에 멈춰서 만화의 줄거리를 검색해가며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적어도 내가 만화를 싫어하는 이유가 불합리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한 번쯤은 해보게 되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사람도 아닌 그림들이 사람인 척 하는 것이 싫었던 것 같다. 게다가 캐릭터들의 유난스러운 목소리와 말투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느낌은 나를 만화에서 더더욱 멀어지게만 한 여러 이유 중 하나였다. 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들이 만화의 이야기에 열을 올릴 때면 나는 한걸음 물러서서 혼자 책을 읽거나 상념에 잠기곤 했었는데 “만화는 유치한 것,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현실세계에서 도피하기 위해서 찾는 비현실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지금은 내가 지금껏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만화조차 실은 ‘사람’이 만들어 낸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을 안다. 나는 그동안 편협한 사고에 갇혀 만화가 비현실적일지라도 사람의 이야기인 이상 완전히 현실과 분리될 수는 없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늘 새로운 생각이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에는 새로운 장소를 찾아가곤 했었는데, 다시 생각이 필요해지는 순간이 오면 지금껏 한 번도 3분을 넘기지 못했던 애니메이션을 마음잡고 한 편쯤 제대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분야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저자는 책의 1부에서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으로 만화 그렌라간과 원피스의 예시를 들며 근대와 현대를 구분한다. 그렌라간에서는 인류를 구하겠다는 거창한 명분으로 존재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그 무엇과 싸우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데 이 들은 ‘근대인’이다. 반면 원피스에서는 비록 ‘배’라는 공간에서 모두 한 배를 타고 협력하며 모험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이 배에 탄 인물들은 저마다 각자의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현대인이 지향하는 삶은 ‘유동적이고 액체적인’ 모습이라는 답을 내린다. 여러 분화된 네트워크 속에서 각자의 일을 하며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분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내린 현대인의 정의가 너무 뻔하고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만화에서 찾지 않더라도 누구나 알고 있는 마치 정답처럼 통용되는 이야기를 대단한 정의인 것마냥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책의 2부에서는 우리가 다원화된 ‘소비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개개인은 모두 다양한 이상과 꿈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결국 보다 수준 높은 소비를 위한 것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나도 저자의 생각에 일정부분 동의한다. 단순히 의식주를 해결하는데 그치는 원시적 사회를 지나 개개인은 모두 다양한 취미활동을 즐기고, 좋은 음식을 풍족하게 먹고,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여러 브랜드의 의류들로 자신을 표현한다. 또한 단순히 안전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차원의 집이 아닌 보다 편리하고, 취향이 반영된 집을 원한다. 어떻게 보면, 사람은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났으니 의지와 상관없이 생존해야만 하고, 그 생존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보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 있어 인류의 삶의 본질은 원시시대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내가 세계의 어느 부분에 뭔가 쓸모가 있어서 태어났을 것이라는 거창하고 말도 안 되는 환상대신, 태어났으니 그냥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라는 현실이 앞으로 내 앞에 주어진 길이다. 그 생활이 풍족한 소비를 통해 편리하게 이루어지면 물론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부의 편중은 사유재산이 생겨나기 시작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어왔던 일이고, 보통은 그 부라는 것이 내 것은 아니며, 내 것이 될 수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사람들은 소비 대신 다른 활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보려 할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가 1부에서 현대의 특징으로 짚은 ‘다원성’이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거의 동등하게 궁핍했던 원시시대에는 모든 사람의 목표가 ‘단순히’ 살아남는 것 이었지만,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각자가 소유한 만큼의 물질로 어떻게 ‘잘’ 살아남을 것이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각자가 모두 다르게 가진 개개의 능력치 안에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앞 서 말한 이유들을 논거로 “대부분의 사람들의 목적은 수준 높은 소비생활”이라고 한 저자의 생각에 반기를 들고 싶다. 사람들은 소비를 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삶을 잘 ‘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산다. 윤택한 삶을 가꿔나가기 위해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소비이지, 소비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숨 막히는 세상, 대안은 있을까?”라는 주제의 결론부에서 저자는 소비생활에서 벗어나 우리와 사회의 발전에 무언가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이에 대한 내 생각은 “세상을 바꾸려 하지 말고 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구원자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의 허상에 불과하다. 나는 세상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세상이 나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 또한 없다.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이 바뀌는 편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3부에서 저자는 평소 나의 지론과 똑같은 말을 하는데 우리가 좀 더 자주 현재에 머무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바뀔 것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늘 미래를 위해 나의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현재가 행복한 미래가 되어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내게는 꽤나 긍정적인 말이다. 적어도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주저앉아 있지는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진지한 내 삶의 단 하나의 꿈은 ‘죽음의 순간’이다. 나의 삶이 끝나는 그 순간에 내가 살아온 일생을 후회하지 않는 것만이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의 목표이며 그간 비뚤어질 수 있는 수없이 많은 순간과 이유와 유혹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죽기 위해 잘 사는 것을 택했을 뿐이다. 따라서 나는 시간의 흐름 위에 있는 그 순간순간에 충실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을 쌓아 올리는 것처럼 나의 현재들을 모으고 모아서 죽음의 순간에 완벽하고 빈틈없이 튼튼한 ‘일생’을 완성하고 싶다. 내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가를 가늠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내게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미래는 막연하고 막막하다. 그래서 나는 보이지 않는 미래를 상상해보려 애쓰는 시간에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삶’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저자의 말 또한 상당히 동감한다.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현재’라는 조각을 살아가되, 그 조각이 모두 맞춰졌을 때는 커다랗고 아름다운 하나의 ‘삶’이라는 그림이 되어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저자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가 시간을 정의하는 방식의 문제이다. 그는 현재에 ‘머무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나는 이 표현이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아무리 머무르고 싶다 해도 절대로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시간을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를 계산하는 것처럼 계산하지만 사실 시간은 움직이지도, 가만히 있지도 못한다. 시간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그 변화과정의 한 지점에 우리가 있다. 적절치 못한 비유일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에 있던 사람이 영국으로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그 사람이 현재에 머물렀다가 과거로 여행을 갔다가 미래로 돌아온 것이 아닌 것처럼, 절대적이지 않은 시간 위에서는 ‘머무른다.’는 표현을 대신하여 ‘흐름을 따른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편이 좀 더 적절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책을 읽기 전에 검색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서평을 찾아 봤었는데 호의적인 평가들이 대부분이라 더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는 휘둘리고 싶지 않았고, 다수가 호의적이라 하여 나까지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흡수하기 보다는 나를 이끌어나가는 가치관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읽었는데 덕분에 나의 중심이 더욱 두터워졌다. 저자의 인문학적인 견해도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야 할 교과서가 아니라,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비판하고 생각해보며 내 방식에 대한 확신을 공고히 만드는 수단이라 생각했다. 저자는 “보다 진정한 삶을, 진정한 자신을, 진정한 만족을 얻고 싶다는 열망이 우리의 이야기를 쓰게 하고, 그런 이야기를 써나가는 인생이야 말로 현대의 가장 이상적인 삶의 모델”이라 한다. 만화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비록 저자가 처음에 염두에 둔 독자는 아니었겠지만, 저자가 쓴 책을 나의 이야기로 만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정한 독자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