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서양은 제2차 산업혁명을 통해 강철, 인공 염료, 전기, 전신, 전화 등의 산업을 변혁시키고 기존의 산업을 크게 변혁시키거나 염료 산업, 전기 산업, 통신 산업, 자동차 산업 등과 같은 새로운 산업을 창출함으로써 당대의 산업 발전과 경제 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발휘하고, 이러한 기술력을 통해 서양은 실질적인 패권국으로 위치하게 된다. 또한 19세기는 오늘날 ?ism으로 불리는 이념들이 많이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했는데, 서양이 식민지화한 곳을 상대로 무역을 진행하며 그에 따른 이득(Gains from trade)을 이야기하며 파생된 애덤 스미스가 주된 정치경제학이 그리고 과잉생산으로 인한 공황으로 인한 중소기업들의 도산과 노동계급의 착취 등의 문제점을 지적한 맑스로 인해 발흥된 공산주의와 이외에도 보수주의, 민족주의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저자인 헨리 조지는 이러한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사유한 당대의 지식인으로써 당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다양한 저서를 통해서 통찰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조지는 경제학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인 토지, 자본, 노동 중에서도 토지에 대한 남다른 시각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당대에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노동가치설을 완전히 부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령 농노를 해방함으로써 그들을 ‘자유인’으로 만들어주었지만 정작 현실은 그들이 농노 때보다 더 못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농노 때는 그들에게 비록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땅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었으나 농노해방 이후에는 경작을 할 땅은커녕 토지의 가치가 상승함으로 인해 자신의 거주지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농노 때는 주인이 그들을 보살펴야할 의무가 존재했지만 해방이후 그런 의무가 사라지고 노동력이 도시지역으로 몰림으로 인해 그들을 농노보다 더 싸게 이용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자유인’으로 태어난‘ 이 영국인의 처지는 노예보다 못하다. 혹시 위에서 내가 영국 노ㄷㅇ업 노동자들의 처지를 제대로 묘사하지 않은 게 있다면, 그것은 멸시당하는 그들의 무지와 야만성, 낮은 도덕성 등 어두운 면뿐이다. 음식의 양과 질, 의복과 주거, 안락함과 여유, 도덕성 등의 측면에서 볼 때, 옛날 남부 노예는 오늘날 영국 농업 노동자보다 나았다. 즉.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고 더 넉넉했다. 잘 관리해서 포동포동 살이 찌고 튼튼한 흑인 한 명의 값이 1,000달러라면 아무리 이기적이고 냉정한 노예 주인이라 할지라도 노예들을 ’자유인으로 태어난 영국인‘처럼 살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백인 노예는 값이 없다.(흑인 노예처럼 거래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화된 가치를 갖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을 지배하는 토지다. 일주일에 9~12실링을 지불하면 성인 남자를 부릴 수 있다. 이 금액은 노예 한 명을 거래하기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 적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일주일에 6펜스만 지불하면 된다. 그들이 쓸모없어지면 그냥 버리면 된다. 그러면 그들은 알아서 교회를 찾아가거나 죽는다.”(141~2p)
이러한 상황을 저자는 맷돌로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맷돌을 갈기 위해서는 위짝과 아래짝을 각각 자본과 토지로 그리고 갈리는 대상은 노동으로 묘사된다. 즉 예전에는 자본과 토지 어느 한쪽만 존재하였기에 노동을 착취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현재는 두 요소가 모두 충족되어 노동이 잔혹하리마치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이렇게 착취를 당하면서도 최저생활을 간신히 영위할 수 있는 임금을 받기 위해서 스스로 노동을 제공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책임은 그것을 고용한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가 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저자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토지에 대한 과세를 강하게 물리고, 자본가들이 정말 필요한 땅만큼 가지게 만들도록 한 뒤 남는 잉여 토지들을 노동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스스로 고용하게 될 것이며 이는 곧 부의 분배가 평등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들과의 접촉도가 높아 국가가 운영하더라도 충분히 효율성을 보장할 수 있는 철도, 전신, 전화, 가스, 수도 등 자연독점에 가까운 산업들을 국가가 자신의 고유기능을 방어하기 위해 그리고 국민들의 평등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직접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란 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지적이고 도덕적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사회진보의 자연법칙이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사회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위대한 교훈이며 우리 모두가 주의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244p) 이처럼 조지가 꿈꾸던 사회의 진보는 단순히 물질적인 부가 늘어나는 사회가 아닌 각 주체가 지적이고 도덕적으로 향상되는 사회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다. 약 100여년이 지난 후의 오늘날은 이러한 조지의 이상적 사회와 비교해 봤을 때 과연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을까? 그의 이론이 실효성이 있고 현실성이 있는지를 따지는 건 사실상 무의미하다. 하지만 그의 이런 사회적인 통찰력을 답습하고 발전시켜 사회를 보는 시각을 넓혀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