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직장의 신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다. 회사라는 조직의 분위기와 일을 명쾌하게 그려낸 드라마로 대중의 엄청난 공감을 얻으며 동시에 인기까지 거머쥐고 있다. 이렇게 직장의 문화와 일이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얻는다는 점은 우리 사회의 청장년층의 대다수가 회사, 조직에서 일하고 있고 취업난으로 보여지듯이 조직 바깥에 있는 사람들마저도 조직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사회를 그릴 수 있게 한다.
영화로도 개봉한 웹툰 ‘이끼’의 작가 윤태호씨가 지금도 연재하고 있는 다음 웹툰이다. 책의 제목이나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주인공을 비롯해 회사 조직문화를 묘사하는 주 컨셉은 바둑이다. 미생은 아직 살지 못한 바둑의 말을 가리킨다. 바둑에서는 두 집을 지어야 비로소 완생이라고 하는데 미생은 한 집만 지어서 아직 완전히 살지 못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작가는 한 집만 지어진 미생을 직장생활을 하는 노동자에 비유하며 두 집을 지어 완전히 살기는 어렵지만 한 수 한 수 두어 두 집을 짓고자하는 열망으로 표현했다.
나는 1권만 책으로 읽고 나머지는 웹툰으로 보았다. 조직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나는 친구의 추천으로 보긴 했지만 사실 1권이 끝나갈 때까지도 별 흥미가 없었다. 나의 지금 이야기가 아니라서 공감이 덜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1권을 다보고 웹툰으로 보면서 푹 빠져들었다. 한 회 한 회 보며 작가가 진정 작가의 길만 걸으셨는지, 혹시 이 작품을 위해 취업을 하신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속속히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선명할 수가 있을까.
어떤 특정한 컨텐츠를 다룬 작품은 치밀하게 쓰여져야 한다. 그 분야의 생활을 제대로 그려내야 함은 물론이요,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여 그 속에서 살아있게끔, 독자로 하여금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게끔 해야한다. 매우 어렵고 고된 작업이다. 이 작업을 허술히 하면 드라마나 책, 영화로 대중에게 공개되었을 때 인기와 공감은 커녕 엄청난 질타를 받게 된다. 미생은 그런 점에서 매우 치밀하다고 여겨진다. 작가 인터뷰에서 10년이상의 준비를 거쳤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다. 아, 역시 미생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작품의 스토리와 전개와 구성에 10년의 준비세월이 녹아 있는 것이다. 역으로 이 작품이 10년 전부터 구상되어 왔다는 점이 또 한 번 놀랍다.
극중 장그래(주인공)은 우리가 생각하는 신화적인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바둑계에서 쓰디쓴 실패를 이미 맛본 실패자로서 청년기를 맞이한다. 보통 직업을 다룬 드라마의 캐스트들중에는 저런 사람이 있을까, 정말로 저런 회사가 있을 까 하는 의구심을 마구마구 샘솟게 하지만 드라마니까 이해한다는 식의 사고가 많았다. 그렇지만 미생은 이런 점에서 본다면 건조하디 건조하다. 소소하거나 작정하고 코미디를 유발하는 요소도 없고, 신분을 속인 재벌의 자제나 악착같은 주인공같은 구도도 없다. 또 회사 사원들의 끈끈함을 넘어선 정말로 가족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눈물콧물 다 빼는 애착관계도 없다. 그저 정말로 직장일 뿐. 간혹 유능한 사원이 나오기도 하지만 어디에서나 박수받고 어디에서나 갈채를 받는 사원은 없다. 그 역시, 유능하지만 조직에서 무참히 깨진다. 장그래도 그와 다를 바 없다. 아니 오히려 나는 작가가 장그래에게 유독 박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그가 입사해서 초기에 손본 프로젝트나 면접말고는 조직에서의 인정을 확실히 받은 적이 없다. 며칠동안 열심히 준비한 프로젝트는 팀을 넘어가기도 전에 헛똑똑이소리만 듣고 무참히 버려진다. 읽는 내내 장그래가 안쓰러워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사회 생활을 갓 시작한 초보에게는 저런 심리적 강타(shock)가 칭찬보다 월등히 많을 것이다. 제2의, 제3의 장그래는 꼭 책에서만 살아있지는 않다. 바로 내 옆이나 뒤에 한 다리 건너서 오늘도 내일도 무참히 깨지는 조직원들이 있다. 나는 장그래를 생각하며 내 주위의 직장인들을 생각했다. 퇴근해도 퇴근한 것이 아니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연장일 뿐. 매맞을 거 알면서도 무거운 마음 이끌고 하루하루 출근하는 한국의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다가왔다. 실적을 잘 내지 못하거나 성과가 적으면 나역시 한편으로 회사에 다닐 자격이 없다고 감히 생각했다. 그러나 미생을 읽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여기저기서 들어보니 누구나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전에 그들은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에 대해 서평을 썼을 때도 언급한 이야기지만, 그 누구의 3.40대도 허투루 세월은 아니다. 모두가 열심히 하는 데 자꾸 그 자리가 좁아져만 가고 자리에 앉아있기가 힘든 안타까운 현실을 보지 못했다.
무거운 만화다. 나를 재밌게 하는 만화가 아니라 이것저것 생각하고 저게 꼭 내 문제만 같은 그런 만화다. 그래서 책을 덮고도 계속 생각이 나고 마음에 돌을 얹어놓은 느낌이다. 그러나 꼭 그 무게만큼 결실이 있는 만화다. 아직 완결이 나지는 않았기에 더욱 그 전개가 기대되고 직장의 어떤 모습을 그려낼까하는 호기심이 솟는 만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