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에서는 침을 놓는 행위를 막힌 혈을 푸는 것으로 해석한다. 풀리지 않는 기가 모여서 몸을 해치니 이러한 침술은 살아감에 있어서 꼭 필요한 의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책 제목으로 침을 놓는 행위를 칭하는 ‘일침’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라고 한다. “혀는 칼이 되고, 말은 독침이 되어 여기저기서 날아와 박힌다. 정신도 덩달아 몽롱하다. 이럴 때 정문일침이 필요하다.(서언 中)” 이처럼 하루사이에 수많은 것들이 바뀌고, 출처조차 불분명한 풍문에 휩쓸려 남을 비방하고 모욕하는 일이 서슴없이 벌어지고 있는 요즘에 정민 선생의 말처럼 막힌 혈을 풀 수 있는 일침과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한 시점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글 하나하나가 크게 마음에 와 닿는다. 책을 열고 서언을 지나, 본론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일기일회>라는 글이 있다. “일회는 일차이니, 단 한 차례다. 일회는 딱 한 번의 만남이다. 만세일기요 천재일우이다. 진나라 원언백의 말이다. 1만 년에 단 한 번, 1천년에 단 한 차례뿐인 귀한 만남이다.” 저자가 그냥 썼고 그것을 다듬어 책을 반간했다고 했다지만, 이런 구절을 책의 초입부에 넣은 것을 보면 내가 이 책을 만나는 것도, 저자의 책을 보는 것도 그리고 우리가 매순간 만나는 인연들이 모두 몇 겁의 생을 지나서 이루어진 값진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설니홍조>라는 글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눈 진흙 위의 기러기 발자국이란 말이다. 분명히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 자취만 남고 실체는 없다.” 눈 진흙위의 발자국이다. 눈이 녹으면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가 지나친 경쟁에 의해 숨 가쁘게 지나쳐온 삶을 되돌아보니 설니홍조처럼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그렇다면 그 발자국을 찍었던 기러기는 어디로 갔을까? 그것 또한 알 방법이 없다. 결국 아무것도 남는 것 없이, 그런 것이 있었다고 말 할 수있는 기억만이 남는게 우리의 삶이다
<인양념마>라는 글에 나온 동화에서는 이런 내용이 있다. “달걀 한 꾸러미를 들고 장에 가던 소년이 달걀 팔아 염소를 사고, 마침내 소를 사고 집을 사는 황홀한 상상에 젖었다. 너무 행복해서 눈을 감는 순간 돌부리에 넘어져 달걀을 다 깨고 말았다.” 꿈을 꾸고 상상을 할 떄에는 행복했었지만, 그것에 심취해 종래에는 실질적인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상상을 하고 꿈 꾼 것만이 잘못 일까? 혈기가 넘치는 젊을 때에는 말도 안 되는 상상에 빠져 현실과 부딪혀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우리 모두가 ‘성공’이라는 하나의 키워드에 목매며 달려가는 것도 이러한 모습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너무 지나친 상상에 취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꿈 꾼행위가 잘못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너무 비약시켜서 생각해버리는 것이 잘못인 것이다. 자신을 알고 그것을 현실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지나친 망상은 결국엔 자신을 무너뜨리게 마련이다.
책 내용 중에 일지사지라는 말이 나온다, 글자 하나에도 그것의 전체적인 의미가 바뀐다는 것이다. 정민 선생이 놓는 일침도 그런 역할이 아닐까 싶다. 지나친 경쟁과 소통의 단절로 인해 막힌 혈을 풀고 잘못된 글자를 고쳐서 글 전체의 완성도를 높여준다. 한낱 시 또한 글자하나에 차원이 달라지는데 하물며 인간이라고 그와 별반 다를 게 있겠는가 싶다. 많은 시간도 필요 없이 하루에 몇 분정도의 여유를 내어 한 글씩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원글 작성 : 2013.04.05
북인동아 작성 : 2013.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