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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아는만큼 보인다
저자/역자
최영도
출판사명
기파랑 2011
출판년도
2011
독서시작일
2013년 01월 21일
독서종료일
2013년 01월 21일
서평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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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내용




  ‘아는만큼 보이고 보는만큼 느낀다.’라는 말은 결국 ‘알아야 느낄 수 있다.’ 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나는 책을 읽으며 아는 것이 늘어날수록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선, 책의 첫 장에서는 일본 국립서양미술관인 ‘마쓰카타 컬렉션’을 소개하고 있다. 일본에 상당히 큰 규모의 서양 미술관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전시되어 있는 모든 소장품이 일본인 ‘마쓰카타 고지로’라는 한 사람의 수집품이라는 것이다. 한국에는 왜 마쓰카타 고지로같은 큰 손이 없을까 아쉬웠다는 저자의 생각에 공감했다. 마쓰카타 고지로의 수집품 가운데는 로댕 필생의 거작인 「지옥의 문」도 있는데, 일곱 점이 주조된 브론즈 조각상중, 한 점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이 꽤 충격적이었다. ‘로댕’이라면, 누구나 이름 한번 씩은 들어보았을 거장인데다가 로댕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텐데, 그런 사람의 작품 중 하나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하게 했다. 굳이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가지 않아도 마음만 먹으면 국내에서 거장의 작품을 실제로 내 눈으로 감상할 수 있다니 꼭 가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삼성생명이 프랑스 정부로부터 구입하여 서울 로댕갤러리에 두었다고 하니, 삼성의 재력이 새삼 와 닿았다. 이 외에도 서울의 로댕 갤러리에는 로댕의 작품 중 하나인 「칼레의 시민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것은 열두 번째로 주조된 마지막 오리지널 에디션이라고 한다.


  책의 두 번째 장부터는, 루브르 박물관, 우피치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물관들의 소장품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림에 담긴 이야기와 화가의 삶이 흥미진진했다. 앞에서 언급했던 로댕의 사적인 삶도 흥미로웠는데, 일종의 삼각관계 이야기이다. 로댕에게는 ‘로즈뵈레’라는 조강지처가 있었다. 하지만 로댕은 재능 있는 제자인 클로델과 사랑에 빠졌고, 클로델이 결혼을 요구했지만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비극이 되어 재능 있던 클로델은 로댕이 자신의 창의적 상상력과 예술적 영감을 탈취해갔다고 믿는 과대망상에 사로 잡혀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부순 후, 창작활동을 중단하고 30년을 외부와 차단된 감금생활 끝에 정신병원의 병상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런 이야기가 모두 담겨있는 작품이 클로델의 「중년」이라는 브론즈 작품이다. 아마 이 작품에는 클로델이 느꼈을 결핍감과,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기고 느꼈을 상실감이 그대로 담겨 있을 것이다. 만약, 로댕이 클로델의 결혼요청을 받아들였다면, 그래서 클로델의 작품 활동이 계속되었다면 세계의 미술사에는 훗날 칭송받는 위대한 작품이 하나 더 기록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이야기 이외에도 남녀관계가 미술사를 바꾼 예는 많다. 르누아르가 인상주의와 결별한 후 형태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따뜻하고 화사한 색채를 쓰면서 고전주의 회화로 복귀하기 시작한 미술 전환기의 작품인 「도시에서의 춤」과 「시골에서의 춤」이라는 두 작품의 남자 모델은 르누아르의 친구 ‘폴 로트’이다. 원래는 여자주인공의 모델도 두 작품에서 모두 ‘쉬잔 발라동’이라는 화가들의 정부였는데, 19살 어린 약혼녀 ‘알린 샤리고’가 질투하는 바람에 시골에서의 춤의 여주인공 얼굴을 알린으로 바꿔 그렸다고 한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꼼짝 못하는 화가의 인간적인 모습이 보여 재밌었다. 거장의 작품도 바꿔버릴 수 있는 것이 사랑의 힘인가 보다. 르누아르의 그림얘기를 좀 더 해보면, 제목을 모르고 그림을 보아도 각각의 그림에는 “‘도시’구나” “‘시골’이구나”를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 특징들이 살아있다. 비슷한 구도를 가진 어찌 보면 똑같은 그림을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그려낼 수 있는 르누아르의 천재성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앵그르의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이라는 작품에 그려져 있는 여인은 「투르크 목욕탕」이라는 작품의 중심에도 그려져 있다. 그래서 두 그림이 합쳐진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액자 속에 사는 목욕을 좋아하는 여인이 액자 속의 우연히 옆에 걸려있는 액자 속 목욕탕을 발견하고 그림 속에서 몰래 빠져나와 옆의 액자로 산책을 간 것이 아닐까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마저 들었다. 또한, 같은 작가의 「그랑 오달리스크」라는 작품은 고등학교 미술시간에 잠깐 스쳐지나간 작품인데 책 속에서 그림을 보는 순간, 문득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그림을 보여주며 미술 선생님께서 지나가는 말로 “여자의 허리가 비정상적으로 긴 것 같지 않니?”라고 했었는데 그 말이 생생히 떠올랐다. 처음 그림을 봤던 고등학교 때, 선생님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한 여자로 느껴졌던 그림인데, 다시 본 그림에서는 여자의 긴 허리만 눈에 들어왔다. 이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하는 건가보다. ‘아는 만큼 보인다.’를 실감했던 부분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메디치 가문’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메디치 가문을 한 번 알게 되고 나니 여기저기서 보였다. 메디치가문의 명맥이 현재까지 이어지나 궁금했는데, 현재는 혈통이 끊어졌다고 한다.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안나 마리아 루도비카는 메디치 가문이 소장했던 모든 예술품을 영구히 피렌체에 기증했다. ‘피렌체’가 미술의 도시라는 명칭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은 상당수의 명작들이 피렌체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는 메디치 가문 덕분일 것이다.


  마네의 「올랭피아」라는 작품과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작품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체의 여인이 비스듬히 누워 왼손으로 음부를 가리고 관객을 바라보는 것도 그렇고, 작품 속에 꽃이 등장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두 작품이 걸어 온 길은 매우 다르다. 「올랭피아」는 서양미술사상 유례없는 큰 소동을 일으켰지만, 티치아노의 작품은 아니었다. 이는, 티치아노의 작품 속 여인이 인간이 아닌 ‘비너스’여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을 모델로 삼느냐 실존인물을 모델로 삼느냐에 따라 같은 분위기의 그림일지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심리가 달라졌다는 이론을 이 두 그림에 직접 적용해 보고, 내가 마치 미술평론가가 된 것 같은 뿌듯함을 느꼈다.


  세계의 유명 미술관들은 레오나르도의 작품 한 점을 소장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한다. 그런데 루브르의 제 5실에는 「성 안나와 성모자」 , 「암굴의 성모」 외에도 「세례자 요한」 , 「아름다운 금세공사의 아내」 , 「바쿠스」 등 레오나르도의 걸작들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 것처럼 벽에 아래위로 다닥다닥 붙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관람객들은 제 6호실의 모나리자 앞에만 구름처럼 모여들어 바글바글하고 제 5실은 언제나 아주 한산하다고 한다. 그래서 제 5실에서는 모나리자보다 어쩌면 더 걸작인 레오나르도의 작품들을 오랜 시간 독점할 수 있다. 루브르 박물관 하면 모나리자, 모나리자 하면 루브르 박물관이니 만큼 루브르까지 가서 모나리자를 놓칠 수는 없지만, 제 5실에 소장되어 있다는 레오나르도의 다른 작품들도 오랫동안 느긋하게 감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세계에는 레오나르도 작품의 경우처럼 유명한 작품의 빛에 가려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걸작들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내내 느꼈던 한 가지는 ‘정말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이다. 부지런히 배우고 보다 넓은 상식을 갖게 되어 숨어 있는 보석을 찾을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천대 받던 그림을 내가 재발견해 모나리자를 이을 걸작으로 재탄생하게 만들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이다.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유는 그 작품이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림을 실제로 본다는 것은 정말 흥분되는 일이겠는가. 그렇다면, 좀 더 많은 작품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책에서나 보던 그림을 실제로 보고 아는 만큼의 흥분과 보람을 좀 더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이유 때문이라도 당분간은 서양 미술사를 좀 더 공부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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