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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그 편지, 그 시대로 나를 초청하다
저자/역자
정용욱
출판사명
민음사
출판년도
2021-02-25
독서시작일
2023년 12월 24일
독서종료일
2023년 12월 25일

서평내용

1. 편지 속 펼쳐진 과거를 다시 걷다

 변화와 충돌의 양상 가운데, 다양한 주체들의 목소리가 담긴 편지들이 도착했다. 이 편지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편지들이 저자에게 도착한 상황을 이해하려면, 왜 ‘편지’여야 했는지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해방 이후에도 한국인들은 주로 편지로 소통했고, 미군은 한국의 여론을 살피는 수단으로 편지를 선택했으므로 이를 철저히 검열했다. 저자는 이런 맥락에서 점령군 당국에 보낸 편지들과 미군정의 검열을 통해 남아 있는 편지들이 있다는 점을 확인했고, 이를 활용하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편지는 일정 부분 사회를 반영하기에 사적이라고만 정의할 수 없는 문서이자, 개인의 내면세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의 성격을 동시에 가진다. 한편으로 편지의 단속적 측면이 한계일 수 있지만, 이는 오히려 압축적 상황을 내포하기도 한다. 저자는 이 점에 유의하면서 전체적 맥락을 고려해 시대를 들여다보고, 그가 생각한 역사성을 드러내려 했다. 저자는 그 기대 효과로써 직접 경험하지 못한 시기의 역사적 망각과 추상성 불식 및 현재의 시점에서 기억을 재해석할 수 있는 동력을 들었다. 독자가 얻기를 바란 현재 시각에서의 재해석이 고정관념 아래 현재에 갇힌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편지 속 이야기를 따라 걸을 때 당대 현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유익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해방과 점령의 교차로 한층 복잡해진 시기의 구조와 역사적 성격을 파악하려 당대인의 ‘목소리’를 채택했다. 여기서 활용된 편지는 역사 서술의 주체가 얼마나 다양했는지 그 사실을 검증해 주체의 폭을 넓혀 줄 것이며, 일상을 세밀하게 담아내 ‘점령’의 무게와 정치·사회를 비롯한 당대의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줄 것이다. 과거로부터 배달된 편지는 저자가 이 편지를 집어 들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이제, 편지 속 과거를 따라 걸을 시간이다.

2. ‘점령’의 무게, 누구에게나 같았을까

 저자가 처음으로 다룬 편지는 김구가 귀국 직전 웨드마이어 중장에게 쓴 편지이다. 김구는 “입국하여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행정적,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로서 기능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는 서약서를 제출한 뒤에야 개인 자격으로나마 귀국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이 편지를 배치함으로 ‘점령’의 실질적 의미와 당대인이 느낀 무게가 귀국하기 전에도 얼마나 컸을지 가늠하게 돕는다. 동시에, 저자는 점령의 차이를 언급할 때 한반도와 일본의 편지를 각각 인용하여 점령의 무게가 어떤 차이 아래 작용했는지도 고민할 시간을 제공한다.

 혁명가들이 환국과 지향 가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사이, 보통의 사람들은 혼란 가운데에서라도 일상의 삶을 재건하려 했다. 국외로 이주했거나 강제로 동원된 이들은 조국 귀환을 서둘렀는데, 조선인 어린이가 쓴 편지가 알려주듯 귀국 시 소지 가능한 금전과 동산의 문제는 새 기반을 닦으려던 이들에게 절박한 문제였다. 하지만, 피해 보상과 귀환, 정착 어느 무엇도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일상을 영위했던 사람들의 편지는 그 사정과 함께 그들이 느꼈을 간절함과 절박함마저 전해주었기에, 점령 가운데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더 크게 와닿는다.

 일본의 경우, 일본의 지배 체제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간접 통치를 시행한 미군에 호의적인 여론과 더불어 천황제에 대한 여러 견해가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식량 배급을 늘려 주기만 한다면 천황제가 없어도 상관없다고 패전국 부녀자가 맥아더에게 보낸 편지나, 한 일본 군인이 자신의 아내에게 천황을 비판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여기서, 천황의 책임 면책이 일본 사회 전체의 면책을 주장할 여지를 준 것이라 인식되어 지배자는 가해자, 국민은 ‘피해자’인 구도가 성립했다. 이 가운데 형성된 증오, 혐오감을 내비치는 편지와 패전 직후의 경제적·사회적 곤란의 책임을 과거 식민지인들에게 전가하려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볼 때, 일본 사회에서 책임 문제를 ‘극복’할 가장 쉬운 길은 현실을 ‘왜곡’하는 방안인 듯했다. 책임 면책의 범위를 넓혀 ‘피해자’인 국민은 진지한 성찰의 시간도 갖지 않은 채 증오와 혐오를 여과 없이 드러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일본도 한반도와 똑같이 점령을 경험했고 그 무게를 감당해야 했으나, 그 실태는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냉전의 격화로 인해 미국이 택한 대일 정책의 방향이 저자가 말하는 점령의 무게와 일본의 가해 의식까지 덜어준 것이라 예상했다.

 이처럼, ‘점령’이 누구에게나 같은 정도로 무게가 작용하지도, 체감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편지로써 파악 가능했다. 물론, 생활 기반을 마련하려는 간절함은 해방된 한반도, 일본 양측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령의 무게라는 기준 아래 그 무게의 차이와 그것이 끼친 영향을 간과하기가 어려웠다. 복잡하면서 미묘한 이 차이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생각과 삶을 가감 없이 서술해 현실을 담아낸 이야기를 통해 분명한 실체가 확인되었다. 저자가 편지를 활용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이런 부분이었을 것이다.

3. 제3의 시선으로 정치와 사회상을 그려내다

 맥락상 정치·사회상과 관련된 부분을 연달아 살펴보는 방식이 관련 내용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적합하리라고 판단해 이에 따라 책을 검토하고자 한다. 저자가 활용한 편지는 점령의 무게뿐 아니라 점령 시기 동안의 정치 및 사회상을 그려낼 기회와 함께 역사가의 시각을 보여준다. 먼저, 저자는 삼상 회의 결정 보도 후의 신탁 통치 논쟁을 거친 좌우 대립 경과를 살폈다. 특히, 보도의 국내 전파 과정을 추적해 워싱턴발로 위장한 국내 신문들의 기사가 사실은 ‘날조 전문가’의 기사에서부터 파급되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언급했다. 여기서 저자는 삼상 회의 결정 보도에서 왜곡된 부분과 보도 과정을 검토하면서 왜곡 보도의 주체에 대한 의문도 제기했다. 단순히 사실에 주목하는 단계를 넘어, 역사가의 비판적 사고 과정을 보여주는 이 작업은 독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는 좌우 대립이 격해지는 상황 속 정치 노선 차이 해결에 있어 ‘폭력적’ 수단을 동원한 우익 진영과 압박받는 좌익의 상황을 보여주는 사례 두 가지를 들었다. 하지의 통역 겸 정치 고문을 맡았던 이묘묵이 연설문에서 좌익을 교묘하게 몰아간 것, 조봉암이 박헌영에게 보내려던 당내 문제 비판 서신을 입수한 점령 당국이 계산을 거쳐 우익 진영 신문들에 이를 공개한 것이다. 이묘묵의 연설문 내용, 조봉암의 서신이 공개된 경위는 당시 정치 상황을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이를 통해 우익과 좌익이 처한 정치적 조건과 각각의 차이, 미소공위 휴회 이후 각 정치 세력이 마주한 정치적 환경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미소공위가 진행되는 와중 서로 다른 입장이 관철된 일련의 사건을 고찰해 기저에 깔린 생각과 목적까지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지만, 당시 인물들이 남긴 편지를 비롯한 글은 그 시기를 비추어 선택의 목적과 함의를 적절히 해석할 단서를 제공하기에 상당히 유용했다.

 그리고 저자는 1차 미소공위 결렬 이후 좌우합작을 모색하던 1946년 6월 하순, 하지가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검토했다. 하지는 여운형과 허헌, 김규식의 회의 성과를 크게 기대하지 않음을 밝히면서 자신이 이승만의 반소 캠페인을 제지해 왔다고 적었다. 하지의 편지에 담긴 그 시선은 직설적으로 상황을 평가하는 듯했다. 저자는 하지가 좌우합작운동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사실과 이승만을 단속해 미소 관계 악화를 막고 미군정이 추진하려던 입법 기구 설립을 공격받지 않게 하려는 의도를 짚어냈다. 김규식과 여운형이 남북 합작까지 상정하고 있는 지향점과는 명백히 차이가 있는 미군정의 지원 의도를 명확히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좌우합작 운동은 생존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진행된다. 일상적인 테러 위협에 노출되던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테러범에 의해 사망했고, 그의 죽음으로 좌우합작의 동력이 소진되었다. 그는 서거 당일, 자신에게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으며 고통 속에 놓여있다는 한 통의 편지를 남겼다. ‘공포’는 해방된 뒤에도 노골적 폭력에 의존해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했으며 미군정 내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 극우 청년 단체와 경찰에 의해 유지되었다. 여운형이 남긴 편지는 그가 어떤 처지 가운데 놓여 좌우합작을 이어나갔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을 직감하기라도 했는지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다는 편지를 김용중에게 남긴 여운형. 저자는 여운형을 대중적 신망이 두터웠던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평가했다. 그런 그마저도 일상적인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면, 일반 조선인들이 받았을 위협의 무게 또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한편, 미국 정부는 사절단을 파견해 한반도에 개입 의지를 과시하고 경제 원조 계획에 대한 의회의 지원을 얻고자 했다. 1947년 여름, 웨드마이어 장군을 특사로 한 사절단은 조선인들에게 서한으로 의견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남한 신문들은 여론을 전달했고, 편지들이 속속히 도착하기 시작했다. 좌익 측 편지는 경제 위기 원인으로 미군정 내 친일파 준동과 결탁 모리배 발호를 강조했고, 극우 세력의 편지는 반탁과 총선 실시 등을 외쳤다. 저자는 웨드마이어 장군의 방한 시점이 한국 사회 나름대로 독립 지연 원인과 해결 방안에 대해 성찰해야 할 시점이었다고 주장했다. 해방된 지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였으나, 사회가 양분되어 각자의 입장을 관철하는 과정은 노골적인 것을 넘어서 직접적인 형태와 행동마저 취했다. 나름의 성찰을 통해 타개책을 모색하려 최후까지 노력한 이들이 남아 있다는 ‘가정’이자 ‘사실’ 아래, 현시점의 관점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저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 있었다.

 2차 미소공위의 정체, 미국의 조선 문제 유엔 상정, 이어지는 소련의 비판과 제안. 일련의 상황 속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2월 김두봉과 김일성에게 서한을 보내 “우리 문제는 우리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남북지도자 회담”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 편지가 발송되기 직전 조선 문제가 안건으로 제출되었고, 소련군이 38선 이북 출입을 금지하면서 유엔 소총회가 선거 가능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감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가운데 전달된 김구와 김규식의 편지로 남북 협상이 성사되었지만, 협상 내용이 실현되지 못했다. 이렇게, 저자는 김구의 서약서에서 남북 협상을 제안하는 김구와 김규식의 편지로 글을 끝맺었다. 이는 앞선 점령의 현실과 무게를 다시금 상기하는 효과를 주면서도, 저자가 주장했던 나름의 성찰 과정과 그 결과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를 염두에 두었을 때, 결과에만 주목해 즉각적이고 단순하게 평가하기 어려웠다. 이보다는 문제의식에 의한 성찰과 그 추진 과정에 초점을 맞춰 그들이 한 노력의 의미를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그렇게 할 때 마지막에 제시된 편지 한 장, 그리고 각각의 편지들이 담는 의미가 폭넓어질 것이다.

4. 편지 속 드러난 삶과 사유의 대화들

 저자가 활용한 편지에는 일반 사람들의 삶을 읽어낼 지점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를 정리하고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민생’을 고찰할 수 있는 부분은 토지(농지) 개혁, 주거권 투쟁, 식량 위기 등이다. 미군정은 모두가 필수라 상정한 토지 개혁에 대해 실질적 ‘계산’을 거쳐 신한공사 소유의 일본인 소유 농지만을 그 경작 소작농들에게 15년 분할 상환 방식으로 유상 매각했다. 다음으로. 저자는 귀환 동포의 주거권 문제를 다루면서 1946년 9월에 신당정, 앵구남정 등의 주민들이 주택 명도 지시를 거둬 달라며 간절한 심정을 담아 하지에게 보낸 탄원서를 인용했다. 이를 통해 밀려드는 인구에도 대책 마련이 부실했던 것, 근처 암시장을 기반으로 삼았던 이들일 경우 생존권까지 위태로웠던 사실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군정 기구 유지를 어렵게 할 만큼 영향을 끼친 식량 위기, 그 절정인 1946년 3, 4월에 일어난 시위도 있었다. 서울에 사는 이상호는 식량 부족의 원인을 쌀의 매점매석으로 파악했다. 실제로, 해방 전후 조선총독부와 미군정의 정책으로 경제 사정이 악화한 가운데 일어난 쌀의 매점매석은 쌀의 구매를 어렵게 만들었으며, 미군정의 강압적인 1946년산 하곡 수집에서 비롯된 농민의 불만은 10월 항쟁으로 표출된다.

 이처럼, 저자는 편지에 기반해 토지 개혁을 비롯한 당시의 상황과 이에 노출된 사람들이 택한 행동을 가능한 자세하게 보여주었다. 해방을 맞고 곧바로 이어진 점령의 시기. 사람들의 삶은 토지 개혁, 주거권 문제, 식량 위기 등의 상황과 조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그 가운데서 끊임없이 본인의 생각을 드러냈고 때로는 그들의 견해를 행동으로까지 연결해 냈다. 저자는 이 지점을 가감 없이 제시해 각각의 문제를 둔 여러 입장이 사람들의 삶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조명하면서 일상이 가진 역동성을 그려냈다.

 이렇게, 저자가 인용한 편지들은 당시 사람들이 어떤 조건과 환경에 놓여있었는지 직관적인 시선으로 통찰할 기회를 제공했다. 정치나 사회적 맥락에서 세심하게 검토하기 어려운 그들의 실제 삶을 오가는 편지로 포착한 시간은 예상했던 대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저자의 편지, 연결된 이야기는 일상과 삶을 넘어 당시의 사람들이 어떠한 사유와 인식을 전반적으로 공유하고 있는지까지도 파악할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낱장으로 인용한 편지로써 한국인이 겪은 해방, 점령의 양상과 함께 당대의 조건, 활동, 정신 등을 독자와 공유하려는 목적의식을 지녔다. 그렇다면, 저자의 의도는 책을 통해 성공적으로 실현되었다고 판단했다.

 또한, 저자는 편지를 인용할 때 대체로 시기적인 측면의 설명을 일정하게 덧붙였다. 이는 독자들이 생소한 편지에 흥미를 보여 집중하게 하는 장점은 그대로 두면서, 공감적·감정적으로만 당대 상황에 접근하는 한계를 제거한다. 편지라는 서술의 특성에서 ‘감정’을 끌어내길 원한 독자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선택한 서술 방식은 과거와 적당한 거리를 두어 그 차이를 인지하면서, 감정보다 시대 상황에 집중하게 도와 그 시기에 초점을 맞추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쉬웠던 점이 남아 있다. 저자는 해방에서 전쟁에 이르는 기간에 축적된 긴장과 공포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함을 말했다. 이 부분에는 동의할 수 있었으나, 저자가 마지막에 제시한 ‘역사적 교훈’은 수용 여부를 떠나 아쉬운 점이 남는다. 저자는 인민군 병사의 수첩과 관련해 자식의 제사상을 차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내세우며 글을 마무리 짓는다. 저자의 이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이해했고, 보편적으로도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다. 다만, 저자의 지향대로 글 자체를 마무리했다면 독자에게 편지로 보는 해방과 점령 시기 역사의 의미가 더 와닿지 않았을까 했다.

 물론, 이와 같은 한계가 있었음에도 편지가 담은 삶과 이야기는 어수선한 시대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했다. 이제, 그 편지가 저자를 떠나 우리 앞에 도착해 있다. 당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우리는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기에, 망설임 없이 동봉된 편지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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