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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국에서 성평등과 자유의지 실현에 대한 질문
저자/역자
올더스 헉슬리
출판사명
소담출판사
출판년도
2015-06-12
독서시작일
2023년 09월 20일
독서종료일
2023년 12월 19일

서평내용

⌷ 세계국에서 여성의 성(性)의 가치

『멋진 신세계』의 핵심 배경이 되는 세계국(World State)은  가부장제가 생겨날 틈도 없이, 결혼 및 출산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 사회이다. 여성을 억압하던 제도와 규범에서 벗어남에 따라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가질 수 있으며, 공평한 인간으로서 대우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세계국 사람들은 남/여의 이분법적 젠더 체계 안에서 자유롭다. 특히나 여성에게만 부과됐던 임신과 출산의 고통은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사라지며, 재생산 도구로 몰락했던 여성을 인간 주체로써 살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양성평등의 이상이 실현된 것처럼 보이나, 세계국에서는 ‘모든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을 공유한다’, 즉 ‘만인은 만인의 공유물’이라는 표어를 가지고 쾌락으로서의 성기능만이 강조되면서 또 다른 종류의 차별이 생겨나게 된다.

제3장에서 레니나가 약 4개월가량 만난 데이트 상대인 헨리가 기능 설정 보조원에게 레니나에 대해서 “탄력이 기가 막혀요.”, “그 여자 한번 먹어볼 만해요.”라며 칭찬하고, 이에 기능 설정 보조원은 “꼭 가져봐야겠어요. 기회만 생기면 당장요”라고 반응한다. 이를 몰래 듣고 있던 버나드는 “마치 그녀가 무슨 고깃덩어리라도 되는 듯 얘기를 하는구나”하고 분노한다. 이러한 부분들을 미루어보아, 결혼제도와 가부장제가 사라졌다고 한들, 여성은 제대로 된 주체로서 있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여전히 세계국 이라는 특수한 세계관에서도 여성의 성은 상품이 되고, 자신의 사회적 가치를 결정짓는 요소로서, 단지 ‘먹어볼 만한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다. 버나드가 헨리와 그의 동료의 대화에 분노하긴 했으나, 과연 그의 분노가 정말 레니나라는 ‘사람’을 위한 분노일까? 아니면 자신이 아직 가져보지 못한 것(레니나)을 가진 남성을 향한 질투심에서 기인한 분노일까?

또한 왜 작가가 남성에게서 정자를 빼앗지 않았는지도 의문이다. 존과 같은 불상사(제대로 피임이 되지 않아 우연히 모체발아가 되어 임신, 출산을 하게 되는 일)가 일어나지 않도록 애초에 남아를 생성할 때에도 여성처럼 남성 태아들 중 30%만을 제외하고 무정자증 남성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레니나와 같은 ‘불임성 쌍태 여성이 아닌 여성’들이 언제나 피임약을 달고 살아야만 하는 것은 ‘여성과 남성 모두 자유로운 성관계를 즐길 수 있는 세상’에서 여성에게만 그 자유의 책임을 지도록 만든 게 아닌가. 스토리 진행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한들 임신과 피임의 의무와 책임은 여성에게만 있다는, 작가가 살던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어쩌면 작가는 우리 사회에서 피임의 의무와 책임이 여성에게만 부과되는 불합리함을 꼬집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현대 사회에서 피임은 남성과 여성 모두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피임에 실패했을 경우 (특히 부부가 아닌 관계에서) 아이를 지우는 고통을 안는 것과 불안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오직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책임에 따른 결과(부담)이라는 점에서 아직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이 크게 실현된 것 같아보이지는 않는다.

과학 발전과 새로운 사상들로 인해 양 성별 간에 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결과적으로 그런 세계국에서도 여성은 여전히 해방되지 못한 채 타자로서 존재할 뿐, 평등은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세계국의 모순을 통해 아무리 결혼이라는 제도를, 가부장제를 없애 본능적인 쾌락을 극대화시키는 사회를 만든다고 한들, 그것은 오히려 성(性)의 상품화와 몸에 대한 주체성 상실만 촉구시킬 뿐, 올바른 평등의 구조가 생겨나지는 않을 것임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 부동(不動)의 동자(動者); 인간다움-자유의지의 실현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무스타파 몬드가 말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야만인이 도전적으로 말헀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늙고 추악해지고 성 불능이 되는 권리와 매독과 암에 시달리는 권리와 … 온갖 종류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할 권리는 물론이겠고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요구합니다”

과연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야만인(존)은 불행할 권리를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곧 ‘자유’를 지향하는 것이다. 세계국에서 자유는 행복을 위한다는 핑계로 제한당하며, 그렇게 얻은 행복(대표적으로 소마)은 조건부적이기에 단발적이고 불안정하다. 따라서 세계국 사람들은 그 일시적인 행복을 계속 원하게 되고, 결국에는 그 순간적인 행복(소마)에 중독되어 소마 없이는 사회에 녹아들지도 못하는 해괴한 구조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선택과 행동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작은 알약으로 손쉽게 얻은, 성관계에서 기인한 정신/육체적 쾌락을 과연 진실한 행복이라 볼 수 있는가? 세계국 시민들이 진실로 행복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살아가며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조건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선택하였기에 행복한 것이다. 즉 인간다움은 선택할 자유가 있을 때 진정으로 발휘될 수 있으며, 행복 또한 스스로 선택한 행복이어야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

20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포드주의의 패러다임으로 인해 인간은 노동체계 속에서 자신의 자율성을 상실, 자유의지를 실현하지 못하고 단지 기계 속의 부품으로 전락해 버린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작가는 포드주의를 기반으로, 자유의지를 상실한 채 부품처럼 기계에서 태어나 이미 정해진 삶을 살아가는 세계국이라는 사회를 만들어냈다 (이는 작가가 포드주의를 비판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를 보아 작가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을 자유의지라고 생각한듯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인간다움(자유의지)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자유의지를 실현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부동의 동자’ (:운동의 궁극원인으로 자연 전체를 움직이지만 자신은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부동(不動)의 동자(動者)’, 즉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창안한 개념임. 필자는 여기서 부동의 동자를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유하고 선택하며 결정하는, 즉 ‘자유의지를 실현하는 존재’ 라는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단지 사회가, 주변인들이 정한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유하고 결단할 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고,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국 사람들은 부동의 동자라고 볼 수 없다. 그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자유의지를 가져본 적이 없으며, 그들의 모든 사유와 결정은 결국 세뇌교육의 산물이기에 세계국 시민들은 ‘부동의 동자(포드, 즉 신)에 의해 움직여지는’ 인간에 불과하다.

불행할 권리에서 ‘불행’은 행복할 권리와는 조금 다르게, 우연적으로 우리에게 닥쳐온다. 우리는 불행을 기피하지, 굳이 선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불행으로 인해 좌절하기도 하지만, 이를 발판 삼아 성장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불행도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진다. 비록 때때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이 다가오면 우리는 성장할 수 없이 주저앉게 된다는 점에서 과연 이 존이 주장하던 ‘불행할 권리’가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던질 수 있고, 어쩌면 이 불행할 권리마저도 그 불행을 이겨낼 수 있도록 상황과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이야기할 수 있는, ‘그들만의 권리’일 수 도 있다는 점까지 나아가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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