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 않겠다고 분명하게 의지를 표현하지도 못하겠다는 이유를 들지도 않는 이 표현,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말하는 편을 택한 것일까?
바틀비는 창백하리만치 말쑥하고 가련하리만치 점잖고,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경사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필경사 일을 하기 전에 다시 되돌아온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분류하고 불태우면서 하루하루 절망을 키우며 허무의 심연을 본 자이기도 했다.
다시 되돌아갈 곳 없는 편지들을 불태우면서 다시 분류해 발송한 편지가 되돌아오지 않길 바랐을 테고 또다시 되돌아온 편지들의 사연을 보며 희망을 잃어갔다. 편지들의 이야기가 마냥 자신의 처지인 듯 편지들을 태우며 자신도 함께 조금씩 태워갔다.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번역에 따라 조금씩 의미의 뉘앙스가 달라지지만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는 안하는 편을 택하는 부정을 선택할 권리를 보여준다.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하도록 되어 있는 현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편을 택하는 바틀비는 이 시대에 많은 생각을 갖게 해준다.
상사의 지시를 따를 뿐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말하며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지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자신은 거부할 수 없었다고 말하며 상사가 지시한 악행들을 따른다. 한나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말하며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은 광신도나 반사회적 성격장애자가 아닌 상부의 명령에 순응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음을 말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권위에 대한 순종이 악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바틀비가 안하는 편을 택한 것에는 악이 이유가 아니었다. 하지만 안하는 것을 택할 권리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만연하게 그것을 하도록 되어있더라도 그 현실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편을 택할 권리는 우리 모두에게 있고 그 권리는 우리들 스스로가 지키지 않으면 언제든 빼앗길 수 있는 권리이기도하다. 바틀비는 안하는 편을 택하면서 마지막 남은 자신과 자신의 부정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고자 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