在中国现代文学史的发展歷程中,1920年代创造社的“转向”起到了十分重要的作用。前期创造社坚持浪漫主义倾向的文学观和创作方法,丰富了新文学的内容;后期创造社提出了革命文学理论,致力於倡导无產阶级革命文学,对1930年代初期中国左翼作家联盟的成立及中国左翼文学的发展產生了巨大的影响。 创造社是中国现代文学史上最重要的文艺团体之一,以它為对象进行的研究也在很多方面取得了大量的成果。但创造社究竟为什么要转向,这种转向意味著什么,又对创造社乃至整个中国文学的发展產生了怎麼样的影响等一系列的问题仍然没有得到解决。 本文从创造社转向的时代背景,创造社主要成员的性格特徵及心理变化,以及前期创造社的同人杂誌的生存歷程等角度,对创造社转向的背景和原因进行了全面的分析,证实了创造社所谓的“转向”,体现了年轻的中国现代知识份子通过文学的手段来推动社会发展、实现自身价值的渴望,同时也是作為媒体机构存在的创造社為了克服同人杂誌团体所固有的致命缺陷而向现代媒体发展的主动顺应。转向虽然意味著作為媒体的创造社的进步,但客观上必须承认,这种转变对文艺的发展没有起到积极的作用。创造社年轻的作家们最终放弃了自己当初对文艺的追求,也失去了知识份子所应有的独立人格。创造社的教训,对我们今天如何看待文艺及文艺家的定位等等,仍有著重要的现实意义。
본 논문은 중국 현대문학사에서 중국신문학의 성립과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창조사를 연구대상으로 하고, 1920년대 창조사가 벌어진 성격변화의 배경 및 원인을 여러 방면에서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창조사 성격변화의 시대적 배경은 중국공산당의 성립과 활동, 5ㆍ30운동과 국민혁명전쟁의 고조, 그리고 지앙제쓰의 국민당에 의한 “상하이 4ㆍ12 쿠데타” 등 중대한 역사사건을 꼽을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성립되어 문예를 통해 혁명을 선전하고자 했으며 혁명문학의 이론 선전과 청년교육에 종사함과 동시에 여러 방면에서 중국 문예계, 사상계 내지 온갖 중국 사회에게 영향력을 미쳤다. 1925년, 5ㆍ30운동 벌어지고 국내혁명의 고조기에 이르렀다. 워낙 민감하고 시대의 책임감이 강한 창조사 주요 성원들은 시대의 물결에 따라 실제의 혁명투쟁으로 투신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지앙제쓰가 주도한 “상하이 4ㆍ12쿠데타”는 공산당을 심하게 탄압함으로써 공산당원과 좌익문예가들이 지하활동으로 들어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은 지앙제쓰의 국민당을 반항하는 수단으로 자연스럽게 비교적 탄압이 적은 문예의 방식을 선택하였다. 공산당과 좌익문예가들은 본격적으로 문예를 통해 혁명운동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하였고, 대규모의 좌익문예운동이 점차 대두되었다. 국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사상의 유입도 창조사의 성격변화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전ㆍ후기의 창조사 성원들은 모두 일본유학 출신으로 일본 프로문예사상을 받았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20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은 1925년 12월 일본프롤레타리아 문예연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고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이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문화가 1920년대의 현대중국 지식인들에게 미친 영향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레닌이 주도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가 방황하던 현대중국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출로를 제시해주었다. 그리고 창조사 주요성원들이 가진 이상주의적이면서도 민감하고 과감한 성격특징도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원인이었다. 순수예술의 아름다움으로 어지러운 중국 사회를 치료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품었던 그들은 5ㆍ4신문학운동 퇴조기에 환멸감과 고뇌를 느꼈는데, 마르크스주의가 배회하는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고 무기를 던져주었다. 결국은 그들은 자기의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기를 위하여 이미 갖고 있던 것을 주저없이 포기하고, 혁명문학의 조류를 이끌었다. 그 다음에는 동인지 문예단체로써 존재하였던 창조사의 성격변화를 동인지 간행물의 발전의 객관적 법칙으로 해석하였다. 동인지 간행물의 고유적 결함을 통해 전기 “창조사” 동인지 간행물의 실패 및 문예단체의 해체를 해석할 수 있다. 《창조》계간과 《창조주보》의 발전과정은 동인지 잡지의 특징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동인지로써 창립된 《창조》계간과 《창조주보》는 동인들의 선명한 입장, 적극적인 협력으로 인하여 한때 중국문단을 뒤흔들 수 있었고 청년 독자들의 관심을 독차지하였지만, 동인들의 열정의 퇴조 및 협력의 와해는 《창조》계간과 《창조주보》로 하여금 원래의 특색과 공격성을 잃게 하여 그들의 존재의 의의를 박탈하였다. 결국은 《창조》계간과 《창조주보》의 실패는 전기 창조사 활동의 중단을 고하고, 창조사 역사상의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다. 창작에 대한 열정의 쇠진, 동인들의 이산과 경제적인 곤란은 《창조》계간 및 《창조주보》 폐간의 주요 원인이 된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전기 창조사의 몰락을 초래하는 동시에, 인과관계를 이루고 있다. 창작에 대한 열정의 쇠진 및 경제적 곤란은 창조사 동인단체의 이산을 초래하였고, 이러한 해체는 역으로 동인들의 창작 열정을 더욱 쇠진하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창조사의 형식과 내용 여러 방면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 동인지 활동의 실패는 그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주기도 하였다. 주식형식으로 조직된 출판부의 성립, 수많은 신진작가들의 진입, 그리고 간행물 원고 내용의 다양화(문예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학, 철학, 혁명이론 등 다양한 내용 실림) 등 변화는 바로 그들은 동인지 시기에 겪었던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하는 노력으로 간주될 수 있다. 순수한 문예 동인지가 이미 포기되면서 순수문예에 향한 추구도 자연스럽게 엷어졌다. 이런 시각에서 살펴볼 때, 창조사의 성격변화는 현대사회 미디어의 발전에 주동적으로 순응하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겠다. 창조사의 성격변화는 당시 중국의 젊은 현대 지식인들이 자발적이면서도 부득이한 결정이고, 자신의 노력을 통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희생하여 새로운 이상을 실현하기를 위하여, 시대의 흐름에 주동적으로 순응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처음부터 그들은 순수문예에 대한 추구로써 중국 사회의 개선을 문예의 아름다움에 기여함으로써, 이상과 자신 가치의 실현에 대한 갈망을 벌써 충분히 들어냈다. 국제ㆍ국내사회의 격변, 자기 생활의 고민, 동인지 이상의 깨짐, 이 모든 것은 결국 그들로 하여금 “순수한 예술”을 포기하고 민중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수많은 현대 중국 지식인들이 사회의 긍정과 주목을 얻기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행동한 결과 오히려 자기만의 입장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중국의 문예발전에게도 소극적인 작용을 하였다. 이러한 비극적인 결과는 창조사의 운명이기도 하고, 시대의 패러독스이기도 한다. 창조사의 교훈은 지금의 우리가 문예에 대해 취해야할 태도, 그리고 문예가로서의 입장의 확립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