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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클레어의 자화상
저자/역자
헤르만 헤세
출판사명
민음사
출판년도
2009-01-20
독서시작일
2022년 03월 31일
독서종료일
2022년 04월 14일

Contents

초등학생 때 학교 도서관을 제집인 것처럼 드나들었다. 그때에는 책을 읽는 게 좋았다기 보다 도서관이라는 특정한 장소가 주는 아늑함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항상 정규 수업이 끝난 뒤 도서관으로 재빠르게 뛰어가 햇살이 잘 들어오는 나만의 지정석에 앉아 책을 읽었다. 아마 그때 처음으로 책의 제목을 보는 습관이 들었던 것 같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죄다 책이니 자연스레 세로로 써진 글자를 한 자 한 자 읽었다. 도중에 흥미를 이끄는 책 제목이면 바로 꺼내 훑어보며 내용이 재밌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면 지정석에 앉아 책을 읽었었다. 신기하게도 그 어린시절 경험이 지금까지도 영향이 있었던 건지 책 제목을 보면 제멋대로 생각이 떠오른다. 책 제목과 연관지어 내용을 유추해보거나, 스스로 평론가가 되어 작가가 책 내용의 가치를 얼마나 함축적으로 제목에 표현했는가 심사해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데미안은 내 예측이 완전히 빗나가는 책이었다.

나에겐 어려운, 데미안

학교 수업을 통해서 처음으로 이 책을 진지하게 읽게 되었다. 사실 『데미안』은 나에게 어려운 책이다. 여느 다른 책들과 비교하면 상징적인 의미들이 상대적으로 많다. 쉽게 풀어 쓸 수 있는 문장에 여러 곁가지가 많이 묻은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낭독하지 않거나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내용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건 해석의 차이인지 아니면 본래의 글 자체가 어려운 건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비록 이 책은 많은 집중을 요구하지만 그만큼 흥미도 일으키는 책이었다. 제목과 이야기를 이끄는 인물이 다르다는 점이 쉽게 책을 놓지 못한 큰 유인이었다.

의뭉스러운 인물, 데미안

싱클레어와 가장 연관된 인물이라 함은 바로 데미안일 것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방황하고 있었던 때 결정적으로 나타난 인물이다. 작가는 어떤 의미를 갖고 데미안을 그려냈을까, 하물며 주인공인 싱클레어를 제목으로 두지 않고 데미안을 제목으로 내세운 것에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 두 가지 의문이 책을 읽으면서 떠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의문은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책에 서술된 데미안의 모습은 참으로 신비롭게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첫인상을 회상한 부분을 보면 어린아이가 보고 느끼기에는 평범하지 않은 평가이다.

싱클레어와 또래인 데미안은 소년과 어른 사이를 오간다. 간혹 아이들이 결코 좋아하지 않는 어른의 표정을 띠는 데미안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특이하고도 의뭉스러운 모습 때문인지 원치 않은 관심을 받기도 한다. 처음부터 범상치 않았던 데미안은 끝까지 독자에게 범상치 않게 퇴장한다. 퇴장한다는 말도 정확한 표현이 아닐 수 있지만 적절한 언급 없이 사라진다.

사라진 데미안

마지막 장에서 데미안은 사라진다. 싱클레어의 모습에서 데미안의 모습만 보일 뿐 향후 데미안의 행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여기엔 여러 가지 추론이 따른다. 첫 번째로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진정한 자기일 것이다. 종내에 싱클레어 ‘자신의 모습’에서 데미안을 발견하고 데미안과 완전히 닮아있다고 언급되어 있다. 두 번째는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알을 깰 수 있도록 도와준 단순히 인도자에 불과한 인물일 것이다. 초장에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프란츠 크로머로부터 구원해주었다. 만약 데미안과 싱클레어를 동일 인물이라고 바라본다면 앞에 언급한 사건은 일어나기 어렵다.

나는 이 가설의 첫 번째 가설에만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책에서 나타난 관점에 갇히지 않고 외부의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책에 차례가 시작되기 전 헤르만 헤세의 내용 일부분이 있다. 그 내용 중 이러한 문장이 있다.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 자기들이 하느님이라도 되듯 그 누군가의 인생사를 훤히 내려다보고 평가하여, ······ 나는 그럴 수 없다, 작가들이 그래서는 안 되듯이. 그리고 내게는 내 이야기가, 어떤 작가에게든 그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나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는 각 인물을 자기가 통제하고 자기의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지휘하지 않았다. 실존하는 인물과 같이 데미안과 싱클레어를 그려냈으며 살아 있는 인간의 이야기로 그려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헤르만 헤세의 창작 가치관이 데미안의 정체에 추론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생각한다.

먼저 모든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인물이 꼭 필요하다.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만난 후 알을 깬다. 그렇다면 애초에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뜻이다. 초반에 데미안은 가족 외에 그 어느 누구와도 친밀하게 지내는 이가 없다. 모두가 데미안을 어려워하고 그 범상치 않은 분위기에 쉽게 친구가 되지 못한다. 데미안 특유의 분위기가 다른 이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데미안이 일으키는 반항이 사람들에게 호의를 받지 못한 것인지 그 원인은 모른다. 그러나 조용했던 싱클레어가 어떻게 데미안과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평온하고 소심했던 싱클레어가 데미안과 친구가 된 것은 신기한 일이다. 분명한 사실은 싱클레어는 데미안에게 끌렸다는 것이다. 데미안을 처음 대하던 경계심과 호기심은 일종의 자기방어적인 태도였을 뿐이다. 나는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자신의 진정한 자기라는 것을 은연중에 알았다고 생각한다. 만약 깨닫지 못했더라도 자신의 무의식 자기였기에 본능적으로 데미안과의 연결고리가 생성된 것이다.

즉, 데미안이 싱클레어인 것은 맞다. 그러나 헤르만 헤세가 언급한 것을 생각해보자면 데미안은 싱클레어 내면에 있던 허상의 인물은 아니다. 데미안이라는 다른 이름이 붙여졌을 뿐 진정한 싱클레어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바꾸어 생각해보면 데미안이 진정한 자아로서 우리 곁에 실존하는 인물이며 싱클레어는 각성하기 전 자신의 본 모습으로 이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옛 자아의 모습이다.

꼭 깨뜨려야 하는가

현대사회는 확립된 지식과 사회적 통념을 꼭 깨뜨리고 개혁해야 하는 강박증에 시달린 것 같다. 그래야 자신이 깨어있고 사회적 인식의 향상에 한몫했다는 우월감에 젖을 수 있기 때문일까. 그러나 자신들이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고정관념과 불평등이 오늘날의 사회 통념과 보편적 가치관이 훼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기존에 있던 보편적 관념에 비판적 사고의 발언과 관점을 가지는 것은 모두 박수 칠 만한, 그리고 박수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그 관점에 당위성이 붙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들이 납득 할 만한 근거가 있어야 하고, 사회적 통념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새로운 관점을 주입하는 것은 일종의 학대와 같다고 생각된다. 내면의 혼돈과 외면의 두려움 속에 있던 싱클레어는 자아가 미숙하고 새로운 관점을 정립할 수 있는 성숙 된 성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서 정립한 데미안의 정체를 싱클레어의 진정한 자기라고 세웠으니 이는 싱클레어 본인이 바르게 세워지지 않은 새로운 관점을 수용하려는 문제로 볼 수 있다. 결국 내가 평가한 것은 데미안 자체가 아닌 싱클레어의 잘못된 가치관의 성립과 데미안을 투영한 현 사회의 문제점이다.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성장 소설로만 본다면 괜찮은 책이다. 그러나 아브락사스와 같은 영지주의적인 부분을 깊이 분석하고 깨야 할 세계에 집착하는 것에 사로잡힌 순간 거부감이 드는 책이다. 이 책은 꼭 한 세계를 깨뜨려야 진정한 자신의 자기실현을 해낼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 세계는 자신이 인지하지 못했던 진정한 자기의 세계를 뜻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넓은 범위로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 즉 기존에 모두가 동의하고 합의된 개념을 무차별적으로 깨뜨려야 한다는 것을 암중에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싱클레어가 받아들이고 배웠던 성경의 이야기들을 데미안의 근거도 없는 주관적 관점을 싱클레어에게 주입한 대목에서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습득했던 관습이나 지식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필요하며 담대한 일이다. 남들의 기준에 따르지 않고 소신껏 행동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데미안은 비판적 사고와 새로운 시각을 지닌 용기 있는 자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데미안처럼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인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서 오늘날의 사회를 보는 것 같은 묘한 기시감이 든다.

젊은이들의 심장

이 책은 헤르만 헤세의 일생을 담은 글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과 같이 평온했던 기독교 집이었으며, 질풍노도의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쳤다. 그러나 주인공과 달랐던 점이 딱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조력자의 유무이다. 싱클레어는 어두운 세계를 자각한 후 내면의 방황과 고뇌 속에 빠져있을 때 명쾌한 해답을 주는 데미안이 존재했다. 그러나 헤르만 헤세는 온전히 자신이 내면의 방황과 고통을 다스려야 했다. 그는 자기실현의 몫을 온전히 감당하였으며 그러한 자신의 경험자산을 책으로 표현했다. 그렇기에 헤르만 헤세와 싱클레어와 같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책으로 평가된다.

충분히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감동을 주는 책이라는 건 틀림없다. 과연 성인권장도서에 빠짐없이 등재되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삶의 방향성과 깊은 울림은 받지 못한 나조차도 권한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인생이 목적지를 잃어 표류하는 배처럼 느껴진다면, 자신의 자아실현에 대한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면 한 번은 읽어보길 권한다. 처음 출판되었을 때부터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책만큼이나 젊은이들의 고동을 뛰게 해준 책이었다고 마무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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