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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정 평등사회를 바라는가
저자/역자
Reeves, Richard,
출판사명
민음사 2019
출판년도
2019
독서시작일
2020년 11월 11일
독서종료일
2020년 11월 11일

Contents

나는 이 책이 몹시 불편하다.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인정하지 아니 할 수 없었다. 이 불편한 진실은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었다. 첨예한 칼날로 메커니즘을 정확히 꿰뚫어 낱낱이 파헤치고 말았다. 

 
우리는 타자화가 익숙하다. 타자화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집단을 쉽사리 매도하며 결속을 다지고 집결을 가속화시킨다. 이권 주장에 있어서 목소리가 모아지고 커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장을 하는 집단의 크기가 커질수록 사회 분위기가 여론에 고착화되어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중산층이 그렇다. 슈퍼리치 1%는 좋은 타겟이었다. 갈수록 극명하게 드러나는 빈부격차를 보며 상위 1%를 나무란다. 중산층이 매년 드나들며 사실상 상위 1%나 상위 20%나 비슷한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은 꽤 먹혀 들어갔다. 
 
빈부격차는 모두 상위 1% 탓이며 그걸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비용은 그들이 지불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그건 실현되지 않는 허울뿐인 주장이다. 빛 좋은 개살구나 다름없을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는 화살 끝을 돌려 하위 20%를 다시 타자화한다. 
 
노력이 부족하다고, 능력 본위주의 사회에서 능력이 부족하면 도태되는 거 아니겠냐고 말한다. 드물게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보며 역시 계급이 낮아도 능력만 있으면 되지 않냐고 자신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며 그런 식으로 자위한다. 우린 나름 평등을 갖춘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자기 위안과 다름없는 소리를 토로하며 다른 집단 탓을 하기 시작한다. 상위 1%와 하위 20%를 매도하는 중간층은 거대 집단이다. 그 수가 타자화 당하는 집단에 비해 훨씬 크기 때문에 정작 중간 집단에 대해 힐난하는 이는 적다. 
 
실상 우리도 그 도의적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건설한 민주주의 시스템 내에서 다수 집단인 우리의 표를 얻으려는 국회의원들이나 정치인들은 입바른 말을 해댄다. 우리가 듣기 좋은 소리들 말이다. 그 치들도 실상 이면을 들여다보면 사실 상위 20%에 속하는 데다가, 득표해서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유지하려면 달콤한 불평등의 속삭임을 계속 할수 밖에 없다. 
 
우리는 평등을 강조하며 불평등한 사회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방관도 동조다. 빈번하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인맥으로 인한 손쉬운 성공이나 주어지는 기회들을 모른 척한다. 어차피 우리도 그 수혜자거나 수혜자 일수 있기 때문이다. 배경보다 능력이 중요한 시대에, 성공하지 못 한 건 게으른 자들의 핑계라고 거들먹거리며 매도하면서 말이다. 
 
실상 그 배경이 향후 성공과 연관이 있다는 걸 모두가 알면서 그 불편한 진실은 차치해둔다. 그 상관관계는 날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고 간극은 벌어지며 계측 이동성을 낮추고 있다. 계급 간 위계를 고착하고 강화시키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이대로만 살아간다면 말이다. 불편한 건 눈 감고, 듣기 싫은 건 귀 막고, 외치고 싶을 때만 입을 열면 되는 일이다. 
 
우리가 그토록 부르짖는 평등은 왜 이뤄지지 않겠는가? 그 적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계층 사다리를 부수고 있는 건 우리 자신들이다. 계층의 상향 이동성에 대한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우리 주변인들의 하향 이동성은 외면하는 게 진실이다. 
 
모든 게 자본으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시대에 성공의 기회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진다는 건 너무나 순진하고도 달콤한 속삭임 아닌가. 우리는 이미 출발점부터 다르다. 기회는 평등하게 주어질지 몰라도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평등을 논하는 건 되려 어불성설에 가깝다. 
 
상위 20%는 자기 밥그릇을 나눠주고 싶지 않다. 더더욱 자기 자식들의 하향 이동성은 생각하기도 싫어하며, 중간층 역시 매한가지다. 폐단은 거창하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큰 계획성 보다는 작은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그들이 내려오지 않는다면 누가 올라갈 수 있겠는가? 계급은 제로섬 게임이다. 모두가 상위를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밑에서 올라가는 이가 있으려면 위에서 내려오는 이도 있어야 한다. 
 
하향 이동하지 않기 위해 중상위층은 고학력으로 자식들을 무장시킨다. 그리고 탄탄한 유리 바닥을 깔아준다. 내려가지 말라고 친절하게도 말이다. 거기에서 오래 머무를 수 있게 건강을 가꾸고 비슷한 이들끼리 지내며 하위에 있는 이들과의 뒤섞임을 거부한다. 가족 역시 비슷한 이들끼리 결혼하고 이루며 이상적인 가정을 가꾸어간다. 그들의 안온하고 안전한 부의 울타리 안에서 말이다. 
 
혹자는 이런 굳어진 사회 속 이기적인 이들이 제 이익을 내려놓고 타인에게 양보하겠냐고 반문할 것이다. 네 말 역시 순진한 착각 아니겠냐고. 하지만 변화는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법이다. 우리가 지금 당장 계층 이동성을 활성화하자고 해서 이 사회가 평등을 구축하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완벽을 이룰 수 없다 하여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 그것 역시 기만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사회 일원으로써 더 나은 사회가 되게끔 추구해야 하고 움직여야 한다.

누군가는 허망한 희망이라 일컬을지 몰라도, 때론 작고 미미한 움직임이 사회를 송두리째 바꿀지도 모르는 일이다. 프랑스 왕정 시대에 절대군주들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누구도 혁명이 일어나 단두대로 생을 마감하리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절대불변은 존재하지 않는다. 혁명은 처음부터 이뤄지는 게 아니다. 우리는 변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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