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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 모두..
저자/역자
니콜라이 고골
출판사명
민음사
출판년도
2005-06-01
독서시작일
2022년 06월 13일
독서종료일
2022년 06월 20일

서평내용

당신은 흘레스따꼬프입니까? 부정하고 싶겠지만, 당신 안에도 흘레스따꼬프가 존재합니다.
<검찰관>은 풍자를 통해 사회상과 인간의 보편적인 내면(많은 사람들이 감추려 하는 속물적 특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이 책을 펼쳤을 때 이 작품이 희극인 것을 알고 당황했다. 중학교 때 ‘인형의 집’을 읽은 이후 희극은 손에 잡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외국 문학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헷갈려서 자꾸만 등장인물 페이지를 펴서 누가 누군지를 확인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나 한번 등장인물들 정보와 특성이 뇌에 각인된 이후에는 꼬북칩을 뜯어서 먹는 것처럼 언제 다 읽었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페이지가 넘어갔다.
부패가 만연한 러시아의 어느 소도시에 암행 검찰관이 온다는 소식을 알리며 시작되는 첫 장면. 그동안 저질렀던 부정부패와 악행이 발각되어 처벌을 받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각 기관의 담당자들에게 주의를 시키고 정신없이 행동하며 전전긍긍하는 시장의 모습. 사실은 하급 관리에 불과한 말도 안되는 허풍쟁이 하급 관리 흘레스따꼬프가 암행 검찰관으로 오해를 받고 극진한 대접 속에서 우쭐대고 그 허풍들을 믿고 떠받드는 주위 인물들. 흘레스따꼬프는 노름으로 돈을 모두 날려 허름한 여관에서 묵으면서 여관비조차도 내지 못해 주인에게 밥을 구걸하던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오해 속에서 그들의 상상에 부합하는 새로운 인물로 군림하며 허상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흘레스따꼬프는 시장의 딸에게 청혼을 함으로써 시장과 시장의 가족까지 그의 허상 세계로 끌어들여 일장춘몽 같은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가 떠나기 전 친구에게 부친 편지로 인해 소도시의 사람들은 흘레스따꼬프가 가짜 검찰관이었다는 것을 알고 엄청난 충격에 빠지며, 설상가상으로 진짜 검찰관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모두를 경악하게 하며 연극은 막을 내린다.
극을 다 읽고 나서 나도 마지막 장면과 마찬가지로 얼마간 무언의 상태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흘러간 이야기였지만 그 곱절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배경은 니꼴라이 1세의 통치기인 1825년에서 1855년이다. 당시 니꼴라이의 공포 정치 속에서도 사회 곳곳에서 부정부패가 이루어지고, 관료 체제에서 거스를 수 없는 권력과 두려움의 대상인 검찰관, 돈이면 다 된다는 물질 만능주의 사상이 팽배했다. 듣기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 모습은 어딘가 낯설지 않다. 약 2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방금 언급한 이 세상의 어두운 면들을 모두 타파하였는가? 선뜻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25년동안 살아오면서 나도 많은 일을 겪고, 들었다. 뉴스에서 정치/경제 면에 나오는 수많은 부정과 비리 관련 뉴스들. 수면 위로 드러난 문제들도 그렇게나 많은데 아직 드러나지 않은 문제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내가 언론을 통해 접하는 뉴스들은 정말 말그대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다. 여전히 돈을 주고 불법으로 허가를 받고, 눈감아주는 등의 보이지 않는 거래는 계속되고 있다. 다원화되고, 사람과 사람과의 접촉이 보다 용이해진 현대 사회에서는 그 거래에 관련된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고, 더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어 어쩌면 과거보다 더 부정부패가 심해진 것 같기도 하다. 한 기관과 관련된 사건이 터져 그 사건에 대해 더 자세히 조사를 하다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관련되어 있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조사가 계속되다 보면 우리 나라에 사는 국민 중 절반 이상이 거론될지도 모른다. 물론 조사 과정에서 또 뇌물과 같은 부정한 일이 개입되어 조사가 중단되지만 않으면 말이다. 최근 일어난 사건들을 접하면서 이미 사회에 대해 많은 실망을 한 상태에서 이 희극을 읽고 나니 더욱 마음이 심란해진 것 같다.
더불어, 과연 나는 흘레스따꼬프가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SNS가 활발해지면서, 우리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현실의 내 모습, Facebook에 올리는 게시물로 비춰지는 나의 모습, 인스타그램을 통해 만들어가는 나의 모습 등등. 흘레스따꼬프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별볼일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해 허풍을 떨어댐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속여 가며 아주 권력있고 부유하고 재능있고, 그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되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SNS를 통해 우리가 바라는 모습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행복하지 않아도 “날씨는 추워지지만, 따뜻한 커피 한잔을 통해 느끼는 소소한 행복. 오늘도 행복하다”같은 게시물을 올림으로써 SNS 상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고. 여행을 다녀온 후 필터를 씌워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풍경 사진을 올림으로써 무릉도원을 다녀온 마냥 행동하고. 심지어 자신의 모습조차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가공하여 올림으로써 사람들의 관심과 좋아요 세례를 받는다. 평가와 순위매기기가 너무나 당연해지고 심지어 컨텐츠로도 소비되는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있다. 특히, ‘n포 세대’, ‘인구론(인문계 학생의 구십 퍼센트다 논다)’, ‘이퇴백(이십대에 퇴직한 백수)’, ‘취포생(취업을 포기한 취업준비생)’ 등의 신조어는 현대 사회의 청년들이 얼마나 좌절 속에 살아가고 있고 공허함을 느끼며 낮은 자존감에서 살아갈지에 대해 추측할 수 있게 한다. ‘빈수레가 요란하다’라는 말처럼 현실의 자기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수록 보여지는 모습을 제어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자신을 있는 힘껏 멋있게 포장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경향이 극대화되어 최근에는 이런 SNS 상에서 비춰지는 또다른 자신과, SNS에서 맺는 관계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그런 사람들처럼 <검찰관> 속의 흘레스따꼬프같이 너무 허황된 모습으로 정말 ‘완전히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내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거짓말이 아닌, 실제 자신의 삶의 일부를 취사 선택하여 내가 보이고 싶은 모습만 보임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나’를 그려나가는 것은 오히려 SNS 상에서라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될 것이다. 귀여운 허풍을 통해 교류하며 자그마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문명이 낳은 현대의 흘레스따꼬프들을 과연 우리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나조차도 그런 흘레스따꼬프 중 한 명인데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 당신에게는 흘레스따꼬프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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