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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젊은이들이 ‘기억’하는 20세기 젊은이들
저자/역자
이향규
출판사명
창비
출판년도
2019-10-05
독서시작일
2021년 08월 10일
독서종료일
2021년 08월 12일

서평내용

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으로 기억하는 한국전쟁

『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은 한국전쟁 속에 있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모아 들려주는 책이다. 저자의 ‘여행’과도 같았던 “런던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 이스트본의 청년, 멘체스터와 벡스힐의 노인들, 아버지의 일기, 영국군 참전군인들과 한국의 대학생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전시, 멘체스터의 제국전쟁박물관, 부산의 유엔 기념공원”과 만나는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전쟁에 대해 그리고 종국에는 ‘전쟁’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게 된다.

저지와 비슷하게 나에게도 2018년 여름의 남북정상회담은 하나의 큰 ‘이벤트’였다. 종전(통일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한국이 아직 ‘전쟁’중이었음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전쟁’이란 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뜨거운 주제로 남아있다. 이런 한국사회에게 『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은 전쟁이란 무엇이었는지, 이것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는지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전쟁’이 어떻게 ‘기억’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한다.

전쟁의 기억에서 국가와 개인을 분리하는 것

그런데 말입니다. 한국전쟁은 왜 시작된 겁니까? 그건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습니까?”

이는 한국전쟁에서 운전병이었던 데이비드 해먼드(David Hammond)가 저자에게 던진 물음이다. 1950년 한국으로 떠난 그가 전쟁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그 이후로 70여년이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아무도 그에게 그 전쟁이 왜 시작된 것인지,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는지, 당신이 어떤 전쟁에 있었던 것인지 알려주지 않았던 것일까? 그의 질문에는 회의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한국전쟁이 그 긴 시간동안 싸우면서 남긴 것은, 지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런데 전쟁에 참전한 그 “젊은이”도 몰랐던 것, 그리고 아직도 모르는 것을 내가 감히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데이비드 해먼드의 물음은 영국의 국방부 뒤편 빅토리아 임뱅크먼트 공원에 있는 런던 ‘한국전 참전 기념비’에 새겨진 문장을 떠오르게 한다. 저자가 소개한 바에 따르면 그 내용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영국군 장병들의 희생에 감사”드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문장은 저자와 같이 한국전쟁이 과연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한다. 데이비드 해먼드의 질문과 함께 생각해보면 ‘그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와 같은 거창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된다.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했던 짐 그룬디, 운전병으로 참전했던 데이비드 해먼드는 모두 경제적인 이유로 전쟁에 자원하여 참전했다고 말한다. 적어도 이들이 그 전쟁에 ‘있었던’ 이유는 ‘대한민국’, ‘자유’, ‘민주주의’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희생’이라 불리는 것이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에서 ‘그 문장’이 새겨진 것일지도 모르나 그들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희생”을 위해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 ‘전쟁’은 ‘개인’과 국가라는 주체에게 서로 다른 의미와 형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전쟁이라는 것을 기억할 때 국가와 개인을 분리시켜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에서 국가와 개인의 목적이, 모든 개인들의 목적이 일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이는 한국전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는 한국전쟁 속의 수많은 피해자인 ‘개인’을 떠올리고 기억해야 한다.

『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은 ‘한국전쟁’ 그 자체보다 그 전쟁 속의 ‘데이비드 해먼드’, ‘짐 그룬디’, ‘데이비드 마이클 호크리지’라는 한 ‘개인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국가’를 위한 어떤 형태의 ‘희생’을 한 공동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주체로, 한 개인으로 인식되고 소개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 ‘국가에게서 개인 분리시키기’를 성공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내가 ‘한국전쟁의 참전군인들’이 아니라 ‘데이비드 해먼드’, ‘짐 그룬디’, ‘데이비드 마이클 호크리지’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기억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전쟁에서 이념가치분리하기

『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의 또 다른 주인공은 저자의 ‘아버지’이다. 저자는 아버지세대의 전쟁경험을 듣는 것이 힘들었다고 고백하는데 이는 그들의 이야기가 단순히 전쟁‘만’의 것이 아니라 “‘북한공산집단’의 만행, 운동권과 좌파 정치인”들의 이야기로까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한국사회에서 ‘한국전쟁’은 단순히 ‘전쟁’으로 이야기되는 것을 넘어 세대갈등, 이념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 그 ‘전쟁’이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채 또 다른 형태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저자와 아버지 간의 대화의 ‘단절’은 우리사회에서의 세대 간의 소통이 단절된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상황인 것 같다. 한국전쟁에 대해 많은 이들이 저자와 같이 침묵했고 그를 통해 지켜진 것이 ‘평화’였다. 비록 이 평화가 서로 맞물리지 않아 불협화음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것이었을 지라도 말이다. 그 평화라는 것은 저자가 소개한 2016년 겨울, 촛불집회의 ‘비무장지대’의 모습과 같았다. 촛불집회에서 두 광장을 사이로 둔 두 개의 ‘편’ 사이의 ‘평화’는 그 두 편이 서로 소통을 단절하고 외면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렇듯 저자와 저자의 아버지의 소통의 ‘단절’에서, 16년 겨울 촛불집회 속 서로 다른 기치를 가진 이들 사이의 ‘외면’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사회의 개인들은 왜 ‘한국전쟁’에 대하여 침묵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일까. 왜 저자와 저자의 아버지처럼 ‘단절’된 것일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를 앞서 언급한 ‘이념’의 문제, 그리고 가치의 문제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역사적인 사건인 것은 분명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사건은 한국사회에서는 아직 완전히 ‘과거’의 것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현재의 가치와 의미로 해석되고 기억되는 부분이 있다. 따라서 생각해봐야할 것은 너무 ‘현재’의 이념과 가치에 치우쳐서 생각하여 전쟁 그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하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기억하는 ‘한국전쟁’은 전쟁일까. 그 전쟁의 현재적인 가치와 의미일까.

그것의 정답이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앞으로 한국사회가 더 기억해야할 것은 ‘한국전쟁’그 자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입장으로 과거를 생각하게 되는 일이 자연스럽고 편할지라도 말이다. 전쟁을 겪은 ‘아버지세대’의 이야기, 그 역사적인 이야기는 한 시기를 담아두는 힘이 있었다. 저자 아버지의 ‘일기’가 그러했는데 그 일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전쟁’의 의미나 가치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아, 전쟁 속에도 사람은 살았구나!’, ‘전쟁이 사람들의 삶을 힘들고 고단하게 했구나!’같은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있었던’ 전쟁에서는 ‘이념’이나 ‘가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 어떠한 이유에서 생겨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쟁에 있었던 이들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전쟁’이라는 것에는 어떠한 분명하게 정해진 하나의 의미나 가치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헌재’가 ‘과거’에 대해 정의내린 현재적인 가치와 의미일 뿐이었다. ‘적지 않은 전쟁을 책을 통해 알아가면서 한 번이라도 이 전쟁을 전쟁 그 자체로 바라본 적이 있었을까? 단순히 현재가 정의내린 그 전쟁의 가치만을 배우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스스로 질문하고 의심해보니 나 또한 “역사를 들으려하지 않고 책에서 배우려”했음을 알았고 이에 반성하게 됐다.

저자 ‘아버지의 일기’를 통해 우리는 전쟁을 겪은 사람들에게 ‘전쟁’이란 그 무엇도 아닌 그저 ‘전쟁’일 뿐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의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이제 한국사회에 필요한 것은 ‘전쟁’을 기억할 때 현재의 가치나 이념과 분리시키는 것이라고 말해주려 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으로 ‘이념’이 아닌 ‘전쟁’을 기억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그 자체로 기억돼야 할 전쟁

11월 11일은 영국에서 ‘추모일’로 1918년 11월 11일 11시에 끝난 제1차 세계대전을 ‘추모’하며 지금도 매년 그 시간에 묵념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에게 ‘한국전쟁’은 ‘잊힌 전쟁’, 또는 기억되지 못한 전쟁이었다. 데이비드 해먼드가 전쟁 후 영국으로 돌아와 받는 대우 또는 환영은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있는 곳의 ‘환영’이 아니었다. 영국에서의 제1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이 기억되는 형태의 차이는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여전히 한국전쟁으로부터 겪은 피해를 고스란히 담고 살아가는 데이비드 해먼드와 같은 이들이 있음에도 어떠한 전쟁은 ‘잊힌’것이 된다는 점이 그 전쟁을 경험했고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서글픈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기억’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이기에 안타깝고 서글퍼지는 것일까.

전쟁을 ‘기억’하는 행위는 전쟁에 ‘있었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삶을 ‘있게’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기억함으로써 죽은 것은 더 이상 죽은 것이 아니게 된다. 마치 영화<코코>처럼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형태로든 ‘기억’만 하면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따라온다. 한국사회는 ‘한국전쟁’의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그 형태는 영국의 11월 11일의 모습과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영국의 11월 11일의 추모에는 단순히 기억하는 행위만 있을 뿐 사람들 각자가 기억하고 추모하는 ‘무엇은’ 다 달랐다. 한국의 ‘기억’에는 정치적 이념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확연히 비교되는 부분이다.

영국의 11월 11일과 유사한 한국의 헌충일 또한 또 다른 형태로 무엇을 ‘기억’하는 날이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저자의 말처럼 “기억해야 하는” 것이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국가에 충성하고 희생한 이’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이처럼 한국사회의 ‘기억’에는 개개인들의 기억에 국가의 기억이 깊게 개입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전쟁에서 국가와 개인을, 이념, 가치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것처럼 또한 전쟁의 기억에서 ‘정치적 성향’을 분리시켜야 한다. 정부의 또는 개인의 정치적인 성향에서 전쟁을 분리시켜야 하는 이유는 역시, ‘전쟁’ 그 자체를 기억하기 위함이다.

“가르치지 않으면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전쟁의 후유증을 안고 살고 있는 참전군들, 그 전쟁 속에서 ‘살아있던’ 많은 사람들의 삶과 그 고통을 이처럼 무의미한 듯 사라지게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전쟁의 기억, 그리고 그 속에 있었던 군인들의 용기는 있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억은 국가만의 것이 아니다. 국가에게 기억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시민 개개인이 그 전쟁과 전쟁 속의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이미 죽은 이들이라도, 어쩌면 이미 죽은 기억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유해를 찾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치 짐 그룬디가 시신을 수습하며 전사자들을 ‘기억’한 것처럼 말이다.

– “한국전쟁으로 상처 입은 모든 젊은이들에게

『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은 ‘짐 그룬디’를 ‘데이비드 마이클 호크리지’를 ‘데이비드 해먼드’를 그리고 ‘아버지’를 기억하게 한다. 또한 한국전쟁과 그 전쟁 속에 살았던 ‘사람’들을 기억하게 한다. 이렇듯 전쟁 속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은 물론이고 전쟁이 놓여있던 사람들은 모두 ‘입체적인’ 것들임을 느낄 수 있었다. 전쟁이 진행된 모습도, 전쟁에 참전한 사람들의 이유도, 전쟁 속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이 그 시기를 살아내며 했던 생각들도 모두 다양하고 어쩌면 제각각이다. 따라서 하나로 정하여 정의내릴 수 없는 입체적인 것을 우리는 조금 더 입체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가는 개인의 몫이다. 이 책에서 소개된 부경대학교 동아리 ‘유엔서포터즈’ 학생들처럼 누군가는 ‘대한민국을 위한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쟁을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형태의 ‘기억’은 누군가에게는 과하고 지나치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저자가 처음에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다시 고쳐 그 ‘기억’을 “평화를 염원하고 전쟁에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는” 것이었다고 “한국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나갔던 영국노인들에게 그 전쟁은 ‘잊힌 전쟁’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어떤 형태로 기억하든 그 ‘기억’은 저마다의 가치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기억할 때 그 곳에서 개인, 이념과 가치 또한 국가를 분리해서 기억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기억된 전쟁의 모습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전투가 아닌 전쟁을, 적의 잔혹함이 아니라 전쟁의 잔혹함을, 전쟁이 사람들에게 남긴 상처를 이야기할 때가 올까

저자의 그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은 ‘우리’가 그런 ‘기억’을 하게 할 것이며, 이미 그것에 깊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전쟁을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은 “한국전쟁으로 상처 입은” 20세기의 모든 젊은이들을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젊은이들이 읽어야할 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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