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인 우수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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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존재한다
저자/역자
룰루 밀러
출판사명
곰출판
출판년도
2021-12-17
독서시작일
2022년 12월 28일
독서종료일
2022년 12월 31일

서평내용

1. 들어가며

요즘 자주 되새기는 문장이 있다. “세상은 나를 닮는다.” 일방적이기보다 쌍방적인 영향 관계를 전제로 한다. 칼 맑스의 토대 상부구조론이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맑스의 초기 사상은 일방적으로 경제가 사회 전반 요소의 흐름의 중심이 된다고 보았는데, 막바지에는 일부분 가역적인 흐름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회가 경제에도 영향을 어느 정도 미치고, 경제도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말이다. 다만, 그럼에도 경제의 영향력이 막대하다고 보았다.

또 내가 맑스에게 영향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은, ‘노동의 소외’에 대한 개념이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노동에 대한 욕구가 있는데, 자본이라는 것이 노동을 인간 근본 욕구로부터 소외시킨다는 개념이다. 심리학에서도 이를 지지하는 연구들이 몇 있던 것이 떠오른다. 외부동기와 내부동기 중 큰 강도와 높은 지속성으로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내부동기이고, 외부동기는 오히려 짧은 지속성과 ‘반감’을 일으킬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는 ‘돈’과 같은 물질적 보상이었다. 혹은 타인의 행동에 대한 칭찬이라던지.

현상적 증거들도 일상에 포진돼 있다. 당장 이런 서평과 같은 개개인들의 창작물만 봐도 알 수 있다. 한 작품만 보아서는 알기 어렵지만, 몇 작품을 보다 보면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그 작품은 그 사람의 ‘어떤’ 부분들을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단지 표면적인 ‘말투’라던지, ‘습관’이라던지 하는 표면적인 특징들. 이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런 자잘한 특징과 이색적인 부분들이 모여 가리키는 그 사람만의 ‘무언가’가 작품에 옮겨간다.

나는 이를 ‘잉태하는 것’이라 표현하고 싶다. 말 그대로 ‘낳는 것’이다. 종종 문학 작품에서는 ‘나의 아이들’이라 표현하던 것이 생각난다. 이런 잉태행동은 가시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만 가리키지 않는다. 이를테면 조각상을 만들고, 노래를 만들고, 레포트를 쓰는 행위들, 혹은 물고기에 학명을 바늘로 꿰어 에탄올처리를 해놓는 행위들이 있다. 내가 말하는 이 ‘잉태행동’은 비가시적인 행동들도 포함한다. 내가 이 책을 보는 것, 노래를 듣는 것, 작품을 감상하는 것. 또 그리고 새로운 물고기 표본을 머릿속으로 위계지어 분류하는 것 등.

내가 생각하기에 세상의 것들을 보고 듣고 이해하며 상상하는 행위들은, 결코 그것들 자체의 본의에서 다뤄질 수 없다. 적어도 생명 주체 단위에서 그러한 것들은 왜곡되고 퇴색될 수 밖에 없다. 이때 그 과정은 그 주체를 닮은 과정 속에서 진행된다. 내가 본 달은 노란색이지만, 누군가의 달은 푸른색이듯 말이다. 달에게 달은 어떤 색일지 모르겠으나, 분명 노란색이나 푸른색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색’이라는 특징조차 달 스스로에게는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또한 ‘누군가’는, 달의 색을 잉태하는 것이다.

2. 책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나

학교에서 교수님들의 수업을 듣다보면, 내 교수님들의 은사님에 대한 언급을 종종 들을 수 있다. 나아가서는 본 학문의 고전 지식인 중 어떤 지식인의 사상적 계보를 이어가는 지도 알 수 있다. 룰루 밀러의 책을 보면서도 비슷한 것을 느꼈다. 화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듯한 ‘데이비드’, 또 데이비드에 지대한 영향을 준 아가시.

내 인생에도 지대한 영향을 준 학과의 교수님이 계신다. 그 교수님의 머리는 희끗하신데, 전공하신 분야의 수업을 이어가실 때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진취적인 모습으로 칠판에 분필을 긋던 모습이 생각난다. 수업을 듣다 보면, “이거야 말로 ‘청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여주인공 ‘소피’는 저주에 걸려 타인을 의식할 때에는 노인의 모습이 되는데,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집중해서 자기의 마음을 표현할 때에는 원래 나이로 돌아온다. 나는 그 광경을 현실에서 봤다. 어떤 현상과 문제에 대해 논리적이고 설득력있는 근거들을 기반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념을 토로하실 때. 세상이 두근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교수님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학자도 있다. 바로 맑스이다. 서론에서 말했던 바로 그 맑스가 이 교수님을 통해 나에게도 큰 영감을 준 것이다. 학과 전공 수업의 과제 중에 우리학과의 사상사 서적을 읽게 되었다. 그때 다양한 고전 주요 학자들의 인물사와 사상사를 읽던 중, ‘노동의 소외’개념에 특히 꽂혀버렸다.

책에서 화자는 데이비드에게서 자연의 냉철함과 막강함에 대한 대응책을 찾고자 했다. 나는 화자만큼 심도있게 가슴뛰는 관심을 갖고서 학자-학자의 세계를 공부해본 적은 없다. 그러나, 맑스의 사상과 더불어, 미셸 푸코의 정치사상, 사르트르와 에리히 프롬의 사상, 니체의 ‘심연’, 카뮈의 부조리함에 대한 사상들에서 이른바 ‘세상의 억까’에 대한 답을 강구해왔다. 이는 통제 불가능한 사고를 당면했을 때 유동적인 세상의 원인 측면도 고려하게 해주는 단어로 느껴져서, 내가 좋아하는 표현이다. 비격식 표현이긴 하지만 말이다.

답을 찾는 과정에서 지금의 세상을 두고 정의한 ‘나-세상’의 시스템은 이러하다. 첫째, 나와 세상은 각기 제멋대로이다. 둘째, 둘 중 누구도 서로의 아이들을 그 자체로 이해할 수도, 간섭할 수도 없다. 셋째, 궁극에는 ‘나’가 있기에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결론은, 세상과 나는 상호적으로 영향을 미치나, 서로의 잉태결과에 대해 내가 비교적 더 독립적이며 세상이 더 종속적이다. 은유적으로 부가 설명을 해보자면, 나라는 로봇을 조작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나’이기 때문에 당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다.

책에서 화자는 데이비드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설명해주다, 데이비드의 몰락에 대한 설명과 교훈을 마지막으로 자기의 이야기를 더 집중적으로 이어나갔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세상의 억까’와 ‘교훈’들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내가 처음 ‘세상의 억까’라는 것을 인식하고 ‘반항’코자 마음먹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였다. 남자친구를 잘못 사귀고, 친구와 사이가 안좋아지고, 기어코 ‘걸레’라는 얼토당토 않은 소문이 만들어져 반에서 학교 전체로, 또 다른 학교로, 또 마을로 이어지기까지 내 인생은 억울함과 자기부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때마침 나에게 큰 위안이 됐던 책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었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저들끼리 나누면서, 기어코 나라는 사람의 말에는 귀기울이지 않고 관심도 없던 일. 재판부에서 주인공이 소외되던 순간과 너무 비슷하다고 생각이 들었었다. 다만 그때 나는 세상이라는 것이 정형적인 상태로 존재하고, 그 속에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행동해야 정상적이며 뒤틀리지 않을지, 어떻게 해야 최선이 최선의 결과로 이어질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갔을 때는 ‘환경’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변적이며, 얼마나 조작적인지를 인식하게 되었다. 가시적인 것보다 비가시적인 것들, 유형화된 것들보다 무형화된 것들이 또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때 사르트르의 존재론을 어렴풋이 접하게 됐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나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개념이어서 구체적으로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인간 존재들은 황무지에 내던져져서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 까지 선택들을 통해 자기자신을 창작해간다는 것. 아니, 이게 확실히 사르트르의 주장이었는지조차 모르겠지만. 당시 내 자신이 그 누구보다 ‘외계인’ 같았던 상황에서 이런 사상들은 가뭄의 단비같이 다가왔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이때부터 잉태를 비교적 적극적으로 시작했다고도 할 수 있다. 세상의 것들을 더 이상 ‘세상’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으로 소화해 나의 세상을 건설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상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것인지를 알게 됐다.

대학을 선택할 시기에 나는 나의 ‘물고기’를 점검하고 싶었다. 당시 나는 내 스스로가 어떠한 환상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마주한 환경이 얼마나 거지같았으며 얼마나 통제불가능 한 것이었는지를, 단순한 합리화가 아니라 일정 부분 절대적인 진실의 측면에서 내가 마주해온 환경이 얼마나 나에게 부조리했는지를 점검하고 확인하고 싶었다.

나의 물고기는 ‘부산’이었다. 유소년기를 부산에서 보내다, 갑작스레 충청으로 가게 됐을 때 내 세상은 혼란으로 가득 찼었다. 그런 내게 부산은 깊고 어두컴컴한, 길고 긴 터널 끝의 빛이었고, 유토피아였으며, 이상이었다. 직면하고 싶었으나, 두려운 것이었다. 나의 불행이 어떻게 물리적이고 물질적으로, 내부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또 어떻게 뒤틀려졌는지를 확인할 단 한 가지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부산’을. ‘나의 부산’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학에 와서 ‘사회학’, ‘심리학’, ‘경제학’, ‘인구학’, ‘정치학’ 등등을 공부하게 됐다. 그런데, 작년쯤부터 세상은 종종 학기별로 어떤 철학자를 건넸다. 21년 2학기에는 프롬이었고, 22년 1학기에는 니체였다. 그리고 지금, 2학기는 미셸 푸코를 건네고 있다. 학기 중 어떤 교양 수업의 과제 중에 “세상의 알고리즘 인지, 나의 알고리즘 인지 요즘 자꾸 니체가 들어온다”라는 문장을 쓴 적이 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하기엔 나의 알고리즘에 이끌린 세상의 알고리즘이 아닐까 싶다. 쓰고 나서 혼자 만족스러워 했던 문장이기도 하다.

푸코를 알게 되고,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니 뭐니들에 관한 학술 논문들을 읽어보며 이번 학기엔 궁극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내가 계층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일상들도 실질적으로 어떤 또 다른 인간 주체들에 의해 기획되고 분석되며 조작하려는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 말이다.

음 이 사실이 내게 준 깨달음은, 계층 사다리의 상층계사람들이 악마적이다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기능적으로 합리적이기에 한편으로는 합당한 진전의 장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것 보다도, 궁극적으로 내 마음을 강타한 감정은 다름 아닌 ‘안도’였다. ‘세상의 억까’의 실재에 대한 깨달음이 주는 안도.

세상의 흐름을 인간의 관점에서 구분해보자면, 계량할 수 있는 부분과 계량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내가 얕게나마 공부했던 것들은 적어도 계량할 수 있는 부분들을 통해, ‘다양한 위치의 인간 행동과 그 파급 효과들’이 원자화된 인간 개개인으로서는 통제하기 어려운 흐름을 형성해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이는 다행스럽게도 내가 생각하던 ‘세상’의 흐름과 상통했던 것이다. 추가적으로 설명해보자면, 개개인의 심리적 차원까지 정치엘리트들의 관점에서 분석되고 조작 가능한 대상으로 여겨지던 것이 2001년부터 있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내게 정말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계량할 수 없는 세상의 흐름들에 대한 사유. 룰루 밀러의 책은 이 사유를 도왔다. 천재지변으로 느껴지는 이른바 ‘자연’의 불가항적 힘에 어떻게 인간은 대응할 것인가? 인간은 중요한가 중요하지 않은가? 과연 점과 같은 존재인가? 그 어떤 불행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또 다시 의지를 밀어 붙였을 때 세상은 어떻게 반격하는가? 그런 반격에는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가? 자기연민, 자기긍정, 자기기만, 자기확신. 어디까지가 허용가능하며 어디부터 조심해야 하는가? 나라는 사람의 ‘잉태행동’은 어디까지가 최선이며 어디부터는 최악이 될 것인가? 세상은 나의 행동을 어떻게 최선으로 만들며 어떻게 최악으로 만드는가? 혼돈과 혼란으로 가득 찬 세상의 메커니즘에 인간은 얼마만큼의 진압력을 지녔는가?

그 수많은 부조리한 하루들을 건너 마침내 차지한 진리가 한순간에 전면 부정당할 때. ‘나’라는 사람은 존재할 수 있는가?

조류는 존재한다.

포유류도 존재한다.

양서류도 존재한다.

그러나 꼭 꼬집어,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 p. 236

데이비드는 ‘숨어있는 작은 것들’을 수집하고 탐험하며, 곧 뒤엔 명문대의 교수도 되고 학장도 된다. 몇 차례의 혼돈들에 강타 당하지만 굴하지 않고 어류들을 수집하고 분류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을 위해 타인의 죽음을 조작하고 우생학에 대한 주장을 강화하다가, 이후에는 비난 속에 그의 동상까지 철거당한다.

이에 화자는 ‘물고기가 중요한가’를 고민하며 ‘물고기를 포기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답들을 찾아보고,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물고기의 반대편에 다른 뭔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 물고기를 놓아주는 일은 그 결과로 또 다른 어떤 실존적 변화를 불러온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p. 248

3.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물고기를 포기하는 것. 별을 포기하는 것. 내가 ‘부산’을 포기하는 것. 내가 보기에 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맑스와 베버도 인정했듯, 계층이 됐든 사회학자가 됐든 과학자가 됐든, 기어코 자신만의 신념체계를 벗어나 세계를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포기한다’는 것은 단지 ‘보완적으로 고수한다’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사회학의 분파가 떠오른다. 사회실재론자와 사회명목론자들. 계층에 대한 다양한 구획이 있지만, 분명 이 구획은 구분을 위한 구분 기준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책에서 ‘어류’라는 것이 실재의 가치에서 명목의 가치로 탈환되어 버렸다 할지라도, 내가 볼 때 ‘물고기’가 실재할 가능성은 현존한다.

책에서는 언어와 존재에 대한 글이 잠시 나온다. 그러니까, 언어가 있으면 존재하는 것이고 언어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설명. 이 장면에서 화자는 언어가 없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 긍정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말을 왜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었는데, 어쩌면 화자의 막바지 질문과 책 제목을 연관지어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즉, 첫째, 책 제목,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물고기’는 분명 있는 언어이다. 둘째, 그러나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 역시 있는 언어이다. 마지막 셋째, 화자는 물고기를 놓아주는 일이 또 다른 실존적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 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수식어 아래 화자의 마음 속 수족관에서 다채로운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미 그 ‘물고기’라는 것은 화자를 많이 닮아서, 화자가 그려낸, 또 잉태해낸 세상들 곳곳에 스며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니체의 ‘내가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도 나를 들여다 본다’는 말처럼, 화자에게 물고기는, 나에게 부산은, 개인 주체 안에서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알게 모르게 화합해 ‘나의 세상’을 잉태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고기를 돌아본다는 것은 나아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의 변덕에 나의 존재를 공연화하고 공고화하는 방법은, ‘세상의 변덕’ 그 자체를 인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수식 속에 기어코 ‘존재’하는 화자의 물고기처럼. ‘유토피아’라는 수식어 속에 기어코 존재하는 나의 부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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