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인 우수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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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
저자/역자
박영호
출판사명
지식을만드는 지식 2012
출판년도
2012
독서시작일
2014년 06월 18일
독서종료일
2014년 06월 18일

서평내용

우리나라는 어느 순간 색깔로 뒤덮였다. 낫과 망치로 점철되는 공산당의 붉은 빛은 우리에게 체제를 전복시키고 국가분란을 유발하는 악성이데올로기로서 분류되었고, 그 빛을 조금이라도 따르는 기색이 보이는 사람이라면 정권은 그것의 시비를 가리기도 전에 그들을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사회적인 죽음을 선고해버리는 이른바 ‘국가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었다. 이렇듯 이유 불문하고 무자비하고 가혹한 대응으로 인하여 사회를 살아가던 개개인은 어느 순간 ‘빨강’이라는 색깔에 혹여 조금이라도 엮이게 될까 두려워하기 시작하고,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불순분자라는 당위성을 자연스럽게 습득하여 그것은 무조건 나쁜 것이며, 우리 도처에 빨갱이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라는 위기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몇 십 년을 지나 공산당의 혁명이 1991년 구소련의 해체로 인해 사실상 그 이데올로기가 공상에 불과했음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공포에 매몰되어 혹은 그 이데올로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종북’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과거의 유령과 우리는 아직도 싸우고 있다.

그래서인가 공산당혁명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주었던 맑스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유연하다고는 할 수는 없는 듯하다. 조금의 틈만 생기면 스멀스멀 고개를 들어올리는 ‘종북’이라는 것은 대학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강의하는 강사가 수강하는 학생으로부터 “반자본주의 및 반미사상을 갖고 있다”며 국가정보원에 신고 당하는 일이 벌어지게 만들 정도로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의 사고의 폭을 좁게 만들기에 충분한 듯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회적 풍토 때문에 맑스의 저작들에 편견을 가지고 멀리하기에는 그 책들이 가지고 있는 당시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역사적,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은 오늘날의 사회에도 충분히 긍정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지 않을까?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이번에 감상문을 쓰게 될 『공산당 선언』은 두 세기에 걸쳐 세계 역사가 혁명의 열기 속에 한바탕 요동을 치도록 만든 가장 영향력 있는 지적·정치적 저작물 중의 하나이자, 마르크스 이론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종착점이 되는 이른바 ‘소외된 노동’이라는 것의 문제에 중점을 두고 있는 저작으로서 관심을 가지고 읽을 만한 저서가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우리 시대, 즉 부르주아의 시대는 그러나 이 계급 대립을 단순화했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전체 사회는 점점 더 거대한 적대적 진영으로, 두 개의 거대한, 서로 직접 대립하는 계급,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나누어졌다.”, “종래의 봉건적 혹은 길드적 영업 방식으로 운영되는 공업은 새로운 시장들과 함께 증가하는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다. 공장제 수공업인 매뉴팩처가 그들의 자리에 들어섰다. 길드의 장인들은 산업 중산층이 된 공장제 수공업자들에게 밀려났다. 서로 다른 자치적인 길드들 간의 노동 분업은 개별 작업장 내의 노동 분업 앞에서 스스로 자취를 감췄다.”

산업혁명, 더 정확히는 2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생산과정의 혁신을 통해 과거 소수의 장인들이 물건을 만들던 것에서 이제는 다수의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들도 손쉽게 기계를 통해서 생산 작업에 동참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그 결과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리는 임금노동자(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무산계급)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제품을 만드는데 참여하고 기여한 시간만큼의 임금을 적절하게 지급받지 못하고 오히려 이들을 고용하고 임금을 주는 자본가(또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유산계급)가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부를 독차지하게 되는 ‘소외된 노동’이자 ‘착취’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또한 프롤레타리아들은 열약한 환경과 완벽한 위계질서의 감독 아래서 인간으로서가 아닌 하나의 상품으로서 과거의 노예와 비슷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로 인해 이러한 생황을 겪게 되는 프롤레타리아가 점점 더 많아져 거대한 집단으로 형성되지만 이러한 거대화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임금을 낮추게 만들었고, 더불어 끊임없이 개선되는 기계장치들은 이들의 노동력을 보다 대체가능한 것으로 만들며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 등 최소한의 노동력을 갖추고 있기만 한다면 모두 노동 도구로 전락시키게 되고 이로 인해 더욱더 노동자들은 사회적 지위가 불확실해짐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기에 진정한 혁명적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부상하게 된다. 다른 사회집단들인 중산층이나, 소규모 공장 경영자, 소상인, 수공업자, 농부 등은 그들의 존재가 몰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부르주아 계급과 투쟁할 뿐 근원적인 문제의 상황에 직면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혁명적이지 않고 보수적이며 반동적이기까지 한 속성을 띤다. 하지만 계속해서 산업이 발전하게 될 경우 그들 또한 쇠퇴하고 몰락하여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편입되기에 결국 사회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투쟁으로 연결되어지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종래엔 결사를 통한 혁명적 연대를 통해 부르주아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의 승리가 불가피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일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불가항력적으로 혁명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맑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20세기의 유럽이 아닌 오늘날의 사회도 그때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맑스의 이런 계급적 투쟁이 오늘날에는 일어날 수 있을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맑스가 이야기하는 프롤레타리아처럼 어떤 상품을 만드는데 투입되는 노동도구에 불과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정작 우리의 태도는 비혁명적이고 반동적이며 심지어 친기업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는가?

당장에 노동 조건 개선 및 임금 상승을 골자로 파업을 하게 되면 파업을 하게 만든 기업을 탓하는 것보다 당장 나의 일생활에 영향을 주고 불편을 주는 파업당사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마련이다. 동질적 노동환경 속에서 서로 간에 연대를 맺기 보다는 그들을 질책하고 경멸하는 우리의 태도는 과연 어디에서 나오게 되는 것일까? 이러한 모습의 이면에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영향과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있었던 경제개발계획과정에서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지던 하나 된 ‘우리’라는 사상이 그러한 반응에 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도 있고 그에 대한 이견도 충분히 가지를 쳐서 파생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노동의 소외로 인한 부의 불평등으로 오늘날의 사회는 반기업적인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자신의 이권을 유지하고 향유하기 위해서 벌이는 로비와 위법행위들은 삶을 넉넉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분을 살 수밖에 없게 되고 이 과정에서 맑스가 이야기했었던 계급투쟁의 성격이 일면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그것이 가지고 있는 크기와 상관없이 우리는 계속해서 계급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나 진배없지 않나 싶다.

사적소유의 폐지

“고대 세계가 막 몰락하고 있을 때, 고대 종교들은 기독교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기독교 사상이 18세기에 이르러 계몽사상에 굴복했을 때, 봉건사회는 당시 혁명적이었던 부르주아 계급과 생사를 건 투쟁을 했다.”, “사회의 일부가 사회의 다른 일부에 의해서 착취를 당한다는 것은 지난 모든 세기에 공통적인 사실이다.”

1장이 역사적 흐름을 통한 계급투쟁을 이야기했다면 여기서는 사적소유 폐지와 관련된 세간의 비판과 모함에 대한 반박을 하는 것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예컨대, 사적소유권의 폐지에 경악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부르주아의 사적소유 독점으로 사회구성원의 9/10은 이미 폐지되어 있는 상태이며 그렇기에 사적소유의 폐지는 생산활동의 중지와 나태함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주장도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 그리고 사적소유의 폐지로 조국과 국적을 없애버리려고 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오히려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역설하면서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의 동질성으로 국가를 초월한 연합의 형성이 필요하다 혹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4장에서 언급되는 “광산주의자들은 도처에서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상태들에 대항하는 모든 혁명적 운동을 지지한다.” 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 문장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2장의 내용 중 오늘날 아이러니하게 읽혀질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맑스가 주장한 10대 조치와 관련된 부분이다. 여기서 맑스는 강력한 누진과세, 국가 자본과 배타적 독점권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한 국가 수중으로의 신용 집중, 농업 경영과 산업 경영의 결합, 도시와 농촌의 차이를 점진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노력 등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는데, 이것이 오늘날과 대조해봤을 때 조치에 대한 해석의 정도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오늘날 사회의 모습과 일견 유사함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미국의 우익단체들은 이러한 10대 조치들을 고스란히 실행하고 있는 미국이 어떻게 자유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느냐는 비난까지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움직임은 맑스가 주장했던 것처럼 불가피한 역사적 진행의 한 과정으로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조금씩이나마 진보해나가는 사회환경 속에서 2장의 끝자락에서 얘기했었던 “계급과 계급 적대를 가지고 있는 낡은 시민적 사회가, 그 안에서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하나의 연합체로 변한다.” 라는 개개인의 자유를 통한 발전이 곧 사회전반적인 발전으로 이어지는 사회를 우리는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게 되는 이유이기도하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정치적인 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개인으로서는 안된다. 그렇기에 맑스는 범국가적인 노동단체의 필요를 역설한다. 또한 그러면서도 부르주아 계급에 반하는 모든 세력들과 연대할 수 있다는 포용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마디로 공산주의자들은 도처에서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상태들에 대항하는 모든 혁명적 운동을 지지한다.” 이러한 널린 마음은 파편화된 개인과 자신과 활동하는 방식이나 이상이 다르면 적으로 배격하는 세태에 있어 가지고 있는 그 의미만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한다. 소소한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만들어진 연대야 말로 지배계급이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실행력의 유무이다. 아무리 말만 번지르르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말로만 행해지는 것이라면 사회적 변화를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맑스의 의견은 다시 한 번 곱새겨봐야 할 이야기가 아닐까? 과거와 달리 마치 벼랑 끝에 매달린 듯한 과격한 움직임이 사회적 분위기나 의식수준 향상으로 인해 어렵다면 보다 영리한 방향으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가야 할 필요성이 제시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다 평등한 사회로

최근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웠던 IMF가 소득불균형을 해소하는 것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과거 “월가를 점령하라” 또는 “1%:99%”라는 슬로건 아래에서 벌어지던 시민들의 자본가에 대한 계급 투쟁적 반발이 이제는 본격적으로 국제적 기구를 통해서 언급이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또한 과거 실패한 공산주의 혁명을 대체하여 이제는 중국이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일부를 흡수하여 새로운 세계 패권국으로 떠오르고 있는 등 세계 질서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현 상황에 대한 대안으로 새로운 페다고지가 요구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 대안으로서 맑스의 저서들을 다시 한 번 탐독해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그리고 소련처럼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바탕으로 공산주의 혁명을 진행시켜서 공산주의 국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오늘날은 맑스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자본주의를 거쳐서 공산주의로 향하는 진정한 방향성을 띠고 있는 시대적 상황임을 감안해보았을 때 이러한 맑스의 저서는 오늘날까지도 그 힘을 뽐내고 있는 저서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과제의 목적으로 짧은 시간동안 이 책을 읽고 대략의 의미를 파악함에 그친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담고 있는 이상과 내용은 한 문장 문장마다 나에게 진실 되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계급투쟁을 그리고 사회적 평등이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어떠한 행위를 하여야 할 것인가 생각해볼 여지를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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